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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그날- 65년전 3월 17일 저문 필리핀의 국부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

등록일 2022년03월19일 00시36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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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 라몬 막사이사이라 는 이름은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통해 아주 친숙하다. 하지만 라몬 막사이사이가 필리핀의 7대 대통 령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 지 않다. 라몬 막사이사이는 필리핀 정치인 이자 독립운동가 중 청백리의 대표 적인 인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어느 블로거는 이러한 정치인이 그 나라에 현재 있었으 면 하는 지도자의 하나로 라몬 막 사이사이를 꼽았다. 1957년 지난 3월 17일은 필리핀의 위대한 정치가로 손꼽히는 라몬 막 사이사이가 세부에서 불의의 비행 기 사고로 사망한 날이다. 그의 생은 어땠을까? 그의 사망일 을 기념해 그의 인생을 살펴보았 다. 라몬 막사이사이의 생애 라몬 막사이사이는 본명은 라몬 막사이사이 이 델 피에로(Ramón Magsaysay y del Fierro)로 1907 년 12월 30일 루손섬 잠발레스 이바의 유복한 가톨릭신자 가정에 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세키엘 막사이사이는 대 학을 졸업하고 기술학교 교사로 제 직하는 일루스트라도스 지식인층 이였고 중류층에 속했다. 아버지가 1913년 미국인 교장과 의 갈등으로 실직한 후로는 어려 운 시절을 보내며 고학으로 잠발 레스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UP대 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운전기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의과대 예과와 엔지니어링을 복수전공하다 호세 리잘 대학 상업대에 편입해 졸업한 다. 1933년에는 버스정비사로 일했 으며, 이때 만난 루스 반손(Luz Rosauro Banzon)과 결혼했다. 부 부 사이에는 차례대로 테레시타, 밀라그로스, 라몬 2세가 태어났다. 이후 부지런함을 인정받아서 마닐 라 운송회사의 총지배인으로도 있 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 하여 보급담당관으로 복무하다가 일본이 필리핀을 침략하자 1942 년부터 항일 유격대로 활동하면서 미군이 상륙하기 전까지 1만명을 지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인기를 얻 어 고향인 잠발레스 주의 군정 장 관으로 임명되었다가 1946년에 아 내와 전 항일유격대 동료들의 권 유로 정치에 입문해 필리핀 자유당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50년에 는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당시 항일 유격대 중 공산주의를 추종했던 '후크발라하프' 그룹(이 른바 '후크단')의 토벌 등 우익적인 행보를 이어가며 정부의 정화에 힘 썼다. 무엇보다 공산주의 세력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민심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이는 실제 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때의 별명 이 '태평양의 아이젠하워'라고 불 렸다. 그는 기동성과 유연성을 중 시한 것도 특징이다. 하지만 이런 개혁 정책으로 견제를 받아 해임되 었으며, 그 해 선거에 나갔다. 1953년의 대선에서는 국민회의당 (Nacionalista Party) 후보로 출마 하여, 내가 먹기 전에 국민이 먹어 야 한다며 자신의 아버지라도 부 정을 저지르면 법대로 하겠다는 유 세로 화제를 모았다. 결국 선거에 서 현직 대통령인 엘피디오 키리 노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돼 그 이후로 복지 정책에 노력하였 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안보 정 책에 협력하였다. 1954년에 마닐라 에서 창설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 (SEATO)에 가입했다. 1954년에는 후크단의 지도자 루 이스 타룩을 투항시켜 유화책에도 놀라운 수완을 보여주었다. 이때 협상 테이블에 앉아 4개월 동안 협 상을 이어간 사람이 바로 베니그노 아키노다. 그러나 불과 4년만인 1957년, 재선 운동을 위한 지역 순방을 마치고 세부에서 돌아오는 중 비행기 추 락 사고로 사망하였다. 시신은 사 고 현장에서 수습되어 장례식이 국 장으로 치러졌고 유족들과 많은 필리핀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 다. 이후 부통령인 카를로스 P. 가르시 아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하지만 가르시아는 막사이사이 사후에 일 어난 정국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 고, 가르시아와 마카파갈 등 그의 뒤를 이은 후임 대통령들 모두가 연임에 실패했으며, 이후 마르코스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필리핀은 발전 가능성을 모두 잃어버린 채 동남아시아의 희망 없는 후진국으 로 추락해버린다. 평가 그의 노력으로 당시 필리핀은 다소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필리핀에서는 국부로 추앙받으며, 집권기에 복지, 토지 개혁과 같은 좌파적 정책과 반공이라는 우파 적 정책을 고르게 펼치려 했다. 당 시의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공산주 의를 지지하면 좌파, 반공하면 우 파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팽배했고, 그래서 오늘날에는 좌 파 사회민주주의로 분류됐을 사 람들의 상당수가 우익으로 분류되 곤 했다. 막사이사이도 토지 개혁 이나, 복지정책을 벌였다는 점에서 무작정 그를 우익이라고 보긴 힘들 다. 물론 현실적 어려움도 있었다. 높은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으로 구성된 상, 하원은 그 의 정책(특히 토지 개혁)에 비협조 적이었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그런 동기가 없어서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펴기 어려웠던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라몬 막사이사이는 청백리로 유명 하다. 개인적으로 무척 검소했으 며, 청년 시절에는 구두가 닳는 것 을 아까워 하여 종이로 신발 깔창 을 만들어 신고 다녔을 정도이다. 게다가 가족이나 친척에 대한 비 리도 일절 봐주지 않는 청렴한 인 물이었다. 대통령의 친척이 공직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로 이 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점 은 부패로 얼룩졌던 페르디난드 마 르코스와 굉장히 대비되는 면모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의 강직하 고 청렴한 모습이 그의 아버지로부 터 유래했던 만큼, 막사이사이 가 문 자체가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 고 산 집안으로 평가된다. 한예로 부인이 영부인이 된 뒤에 필리핀 내의 지주, 대기업 총수 및 유력 정치인의 부인들과의 커넥션 을 만들려고 그들을 대통령 관저 에 초청했는데, 막사이사이가 이에 노발대발하며 이들을 모조리 내쫓 은 일도 있었다. 정치인의 청렴함은 국가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하물며 필 리핀 같은 개발도상국이면 더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막사이사이는 서 거 당시 정치인으로서는 새파랗게 젊은 50세에 불과했던데다 재선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필리핀의 정치 적 혼란과 경제적 몰락의 시작은 바로 이 막사이사이의 사망과 뒤이 은 대통령들의 연이은 재선 실패, 그리고 결국 마르코스라는 희대의 독재자의 등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막 사이사이와 같은 청렴한 인물이 정상적으로 재집권에 성공하고 그 뒤에도 '국가의 큰 어른'인 전직 대 통령으로서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 다면 설령 경제적으로 큰 발전은 하지 못하더라도 국가 청렴도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기여가 있었을 것이라 평가한다. 막사이사이상 막사이사이의 아시아 평화 정책을 기리는 의미로, 록펠러 재단의 지 원을 받아 재단을 설립하고 막사 이사이상이 제정되어 있다. 한때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렸을 정 도로 아시아 지역에서는 권위있는 상이었다. 대한민국 국민 중 수상 자는 다음과 같다 -공공봉사 김활란(1963), 김용기(1966)김형서 (1969)장기려(1979)엄대섭(1980) 오웅진(1996)박원순(2006)김선태 (2007) -사회 지도 이태영(1975)제정구(1986)김임순 (1989) -언론, 문학, 창조성 교류 장준하(1962)윤석중(1978) -평화, 국제이해 강정렬(1981)법륜(2002) -신흥 지도자 윤혜란(2005) -통합 김종기(2019) 대단히 소탈하고 검소한 생활을 즐 기던 사람이니만큼, 평소에도 낡 은 차를 몰고다니거나, 쉬는 날에 는 종종 자신의 생가로 내려가서 유유자적한 시골 생활을 즐기는 것 을 낙으로 삼았다. 당연히 사치와 도 담쌓고 지내다보니,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 취임식을 위해 대통 령 관저인 마라카낭 궁전[18]으로 들어갔을 때, 계단 위에까지 레드 카펫을 깔아놓은 걸 이불로 잘못 알아서 그곳을 침실로 착각하거나, 관저가 너무 으리으리하게 생겼다 며 투덜대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 다. 또 옷차림 또한 검소하고 단정한 걸 좋아해서, 첫째 딸인 테레시타 막사이사이가 반바지를 입고나오 자, "그런 건 유럽이나 미국에서 입 는 복장이다!"라며 노발대발하면 서 치마나 청바지로 갈아입으라고 했던 일화도 있다. 자료 나무위키 정리/편집: 마닐라서울편집부

양한준(편집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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