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한국 전쟁 때, 경이적인 인간미와 이타적인 행동으,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한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군사를 파병했다. 당시 필리핀 사회도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으로 다투고 있었고,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느라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필리핀은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 전쟁에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로 전투병을 파병한 국가였다. 필리핀 병사들은 1955년까지 한국을 보호했다.
필리핀 선발 부대는 1950년 9월 19일 항구 도시인 부산(Busan)에 첫 발을 디뎠다. 1955년 6월까지 정예 필리핀 참전 부대(PEFTOK: Philippines Expeditionary Force to Korea)의 깃발 아래에서 한국 수호를 위해 복무한 5개 전투 대대 중, 제 10 전투 대대가 첫 번째 부대가 되었다.
7400명 이상의 필리핀 장교와 병사들이 한국에서 복무했다. 최근 모두 80대가 된 이들 참전 용사들 중 5명이 한국 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한국 정부가 “한국 재방문 프로그램”의 하나로 필리핀 참전 용사들과 그들의 가족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을 지원했다.
이들 참전 용사들은 15명의 필리핀인 자녀 혹은 손주들과 함께 동행했다. 그들의 한국 방문을 국가 보훈처(South Korea’s Ministry of Patriots)와 참전 용사 전우회(Veterans Affairs)가 주관했다.
필리핀 참전 용사들은 모두 지난 60년 동안 한국이 이룩한 엄청난 발전에 크게 놀랐다. 한 참전 용사는 현재 필리핀과 한국의 경제 상황이 1950년 두 나라가 보여줬던 상황과 정 반대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한국 전쟁 당시, 필리핀은 동아시아에서 경제와 군사력에 있어서 선진국이었으며, 일본에 이어 아시아 두 번째 경제 대국이었다. 1950년대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국가 중의 하나였던 한국이 이제는 1인당 국내 총 생산량(GDP)에서 세계 30대 부자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최 고령 참전 용사
“재 방문자” 중에서, 올해 86세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지저스 디존(Jesus Dizon) 씨는 “한국 전쟁 이후에 한국이 이렇게 빨리 발전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한국 국민들에게 찬사를 보낸다.”라고 말했다.
그의 부대는 제 20 전투 대대로, 한국에 파병된 두 번째 필리핀 부대였다. 디존 씨는 전투 야전 포병 부대의 5기의 105밀리 곡사포의 타깃을 지정하는 전방 관측병(Forward Observer/FO)으로, 연합군의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전방 관측병(FO)은 야전 전화와 한 쌍의 쌍안경, 지도 그리고 엄청난 용기로 그들의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통상적으로 잘 엄폐된 고지나 적의 부대 근처의 유리한 지형에 위치하면서 적의 활동과 움직임을 관찰했다. 전방 관측병의 삶과 죽음의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북한 지역에 대규모 중공군이 갑자기 나타났던 날도 디존은 관측을 진행하고 있었다. 디존은 그 앞에 펼쳐진 지도상에서 적 진지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그는 침착하게 야전 전화기를 들고 자신의 후방 몇 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던 포병 지휘 센터에 목표 좌표를 전달했다.
“발사.”라고 그는 명령했다.
한 발의 105밀리 고폭탄이 중공군 진지 주변에서 폭발했다. 디존은 그의 쌍안경을 통해서 탄착 지점의 오차를 기록했고, 야전 전화기를 이용해서 수정 좌표를 하달 후, 전 포병부대에 사격을 명령을 하달했다.
필리핀 군이 운용하는 6문의 105밀리 곡사포가 중공군을 향해 맹렬하게 포탄을 발사했다.
디존은 당황한 중공군들이 그들 부대 여기 저기에서 터지는 살인적인 폭발에 두려움으로 휩싸이는 것을 목격했다.
불과 몇 분 내에 불바다가 되었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집중 포화에 따른 짙은 먼지와 연기 구름이 죽은 수 많은 중공군 병사를 위한 묘비처럼 피어났다.
임무 수행 중에 부상
루미노소 크루즈(Luminoso Cruz)씨는 서울 남쪽 30 킬로미터에 위치한 번화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수원을 회상하면서, “이곳은 모두 평지였다.”고 설명했다. “이곳은 평지였고, 잿빛이었다.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됐었다.”
수원은 크루즈의 부대인 제 10 전투 대대가 한국에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곳이다. 1950년의 일이고 제 10 전투 대대는 한국에 파병된 5개 전투 대대 중에서 첫 번째 부대였다.
수색 부대원이었던 크루즈는 75밀리 야포로 무장한 M24 채피 경 장갑차의 포수였다. 그는 임진강 강변에서 머리에 파편에 의한 부상을 입었는데, 그가 비무장 지대를 방문하는 동안 버스가 임진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면서 그곳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임진강변을 가리키며, “이곳이 내가 부상 당했던 곳.”이라고 말했다.
믿기지 않는 공포의 밤으로 회상하는 유명한 율동 전투에서 그는 2인용 참호에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밤새 밀물처럼 공격해 왔다. 동료와 나는 소총을 쏘고 또 쐈다.”라고 1951년 4월 23일 벌어졌던 피투성이 전투를 회상했다.
그는 자신들이 어떻게 이 지옥 같은 율동 전투에서 생존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동료는 이후에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너무나 참혹했던 전투로 인해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당시 그것을 “전쟁 신경증”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부른다.
필리핀은 율동 전투에서 한국 전쟁 중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단지 900여 명의 필리핀 병사들이 4만 명에 이르는 완전 무장한 중공군의 밤샘 공격에 맞서 싸웠다.
율동 지역에서 맞서면서, 필리핀 군은 운명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는 대규모 중공군의 진군을 늦추는 역할을 했으며, 이는 연합군의 피해를 방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공산주의가 남한을 점령하는 것을 제지했다.
한 사람의 업적
쾌활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플로렌도 베네딕토(Florendo Benedicto)는 제 10 전투 대대와 제 20 전투 대대 두 곳에서 모두 복무했다. 그는 전투를 좋아한 나머지 제 20 전투 대대에 재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베네딕토는 약 183센티미터의 신장을 가지고 있다. 그 시기의 군대에서는 키가 큰 사람들이 무거운 장비를 운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반적으로 포수 역할을 맡겼다.
베네딕토의 분당 최대 6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30구경 M1919 기관총을 담당했다. 이 무기는 그 자체 무게만 14킬로그램에 이르렀으며, 베네딕토의 임무는 이 기관총을 운반하고 공산주의 적들을 향해 발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일을 2년의 전투 동안 셀 수 없이 수행했다.
한국의 부러운 경제적 번영은 한국 국민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강한 결속력에 기인한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들의 국가적인 결속력은 본받을 가치가 있다.”고 그는 말하면서, “필리핀인들은 한국 국민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우리는 모든 필리핀인들 가슴속에 사랑을 심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이전의 용맹스런 전사들에게 놀랄 만한 변화다. 만약 누군가가 그가 한국 전쟁에서 한 일을 알게 된다면, 놀람의 연속일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을 때, 베네딕토는 “나는 거의 200명의 중공군을 죽였다.”고 말하면서, “아마도 300명 이상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죽은 시체의 수를 헤아리지는 않았으니까.”라고 말했다.
한국 전쟁에서 3년 동안 끊임없이 전투에 참여하면서 112명의 필리핀 병사가 전사한 것을 고려했을 때, 베네딕토의 성과는 엄청난 것이다.
겨울의 경험
콘스탄시오 산체스(Constancio Sanchez)는 한국 전쟁이 6월 25일 시작한지 3개월 이후인, 1950년 9월 19일 제 10 전투 대개가 배로 부산항에 도착했던 역사적인 날 24세 생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았는지, 그의 장교가 산체스에게 한국 땅에 첫 번째로 발을 내딛는 필리핀 인 병사가 되도록 해주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북한 공산주의 군대에 둘러 싸인 항구 도시의 한 음식점에서 간식을 제공했다.
산체스는 본부, 본부, 그리고 제 10 전투 대대의 참모 그룹인 지원 부대에서 근무했다. 이 대대는 마리아노 아주린(Mariano Azurin) 대령이 처음에 지휘를 했고, 1951년 봄에 아주린을 대신한 디오니니오 오헤다(Dionisio Ojeda) 대령이 지휘했다.
그가 전쟁에서 마주한 모든 위험한 것들 중에서, 산체스에게는 필리핀인들에게는 생소한 겨울이라고 불리는 이국적인 환경이었다. 1950년 12월, 중국 공산주의 군대가 전쟁에 개입하고 필리핀의 제 10 전투 대대를 포함한 연합군을 북한 지역 밖으로 내몰던 그때, 그의 대대는 평양에 있었다.
1950-1951년의 겨울은 근래 20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사실상 심각해진 치열한 전투를 추위가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그는 “우리는 중공군이 오고 정말로 빠르게 진격했을 때 깜짝 놀랐다. 우리는 포위망에서 빠르게 철수해야 했으며, 그 겨울은 정말로 추웠다.”고 말했다.
중공군이 좀더 일찍 공격했다면 필리핀 전투 대대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을 것이라고 산체스는 믿고 있다. 이른 겨울은 그들의 자동차들을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극심한 영하의 추위는 엔진에 있는 물을 얼어붙게 했고, 엔진 부품 부분에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수송 부대와 본부 및 지원 부대를 포함한 전투 대대의 대부분의 차량 운행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물에 부동액을 첨가해서 문제를 해결했고, 극심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이 왔을 때, 간신히 전투용 트럭, 지프차, 무장 차량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우리가 그때 눈길을 걸어서 이동했다면, 아마 평양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신의 재발견
프루덴시오 메드라노(Prudencio Medrano)는 한국전에 참전한 세 번째 필리핀 참전 부대인, 제 19 전투 대대의 본부 지원 부대에서 근무했고, 또 다시 제 14 전투 대대에 재 입대 했었다. 이는 그의 친구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는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재 입대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제 19 전투 대대에 있던 동료 5명은 근무를 연장하기로 결심했는데, 그들이 나에게 나도 근무 연장을 하고 싶은지 물었고, 나는 내 친구들을 따라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두 전투 대대에서, 메드라노는 제 19대대 지휘관인 콜 라몬 아귀레(Col. Ramon Aguirre) 대령과 제 14대대 대대장이었던 니카노르 히메내즈(Nicanor Jimenez) 대령의 무전병으로 근무했다.
메드라노는 제 19대대에서 그가 아귀레 대령과 함께 전방 지휘소에 자주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임무는 음성 메시지와 모르스 부호(Morse Code) 형태로 전달되는 통신문을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었다. 부대의 목숨이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정확성에 좌지우지 되었다.
메드라노는 한국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신을 재발견 했다. 전쟁이 고착된 전선에서의 임무와 지루함 속에서 그는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장현화 기자[7/8 인콰이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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