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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한인사회 큰 별★이 지다!

향년 86세, 장례는 ‘필리핀한인총연합회 葬’

등록일 2019년12월14일 20시33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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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한인사회의 초석을 다진 한덕우 고문이 지 난 12월7일 새벽 2시 13분에 향년 86세의 일기로 별 세했다. 故 한덕우 고문은 숭실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5년 여정도의 무역업을 하다가 지난 1965년 단돈 100불만 소지한 채 홍콩을 경유, 필리핀에 도착하여 65년을 생 활했다. 故 한덕우 고문은 지난 2011년 ‘마닐라서울’과의 인 터뷰에서 “필리핀에 처음 왔을 때 필리핀은 한국과 비 교할 수 없는 부자 나라였다. 은행 뱅킹 시스템에서 수 십, 수백만 불의 입출금이 가능했고, 한국에는 당시 흑백TV밖에 없었는데, 필리핀은 컬러 TV방송국이 5 곳이나 있었다.”고 회상하며, “시장을 분석해 보니 모 든 상권의 주인이 화교였다며, 내가 필리핀에서 신용 만 얻게 되면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하면서 사업에서 ‘신용’을 강조 했다. 故 한덕우 고문은 필리핀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자 물통, 간이 이음새 제품 등을 판매하였으나, 당시 자 본이 없어 3~4년은 매우 힘든 생활을 보냈다. 故 한덕우 고문의 사업이 반열에 오른 것은 사과 무 역을 시작한 72년부터다. 당시 일본 사과는 5~6불했 는데, 한국 사과는 3불이라 필리핀 시장을 빠르게 점 유할 수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하지만, 사과 박스에 대한 포장 문제로 마닐라 부두 가 사과 천지가 된 적도 있었다며, 많은 사람들의 도 움으로 72~77년도까지 사과 수입상으로 큰 성공을 거 뒀다고 밝혔다. 이후, 중국 사과의 수입으로 한국 사과 수입이 어려워 졌 을 당시, 한국의 풍산 금속과 거래를 시작으로 필리핀에 화 약과 탄피를 구분해 수입을 하는 사업을 발전시켰으며, 영 성무역의 주력아이템인 필리핀 돈을 용도에 따라 구별해 주는 뱅크노트 프로세싱이라는 사업을 펼치면서 오늘날의 영성무역으로 성장했다. 故 한덕우 고문은 1980년부터 81년까지 한인회 2대 회 장을 역임을 시작으로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 앞장 섰다. 1991년 10월 5일에는 필리핀 최초의 한인경제단체인 무 역인협회를 출범시켜 초대 회장을 역임했고, 1996년 필리 핀 한인상공회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으로 한인상공인들 의 화합과 협력에 노력했다. 특히,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에 관심을 갖고 있는 故 한덕 우 회장은 필리핀한국국제학교 초대 이사회 이사로서 현 재의 필리핀한국국제학교 설립에 기여를 하였으며, 지난 2013년에는 회사의 이름을 딴 ‘영성백일장’을 개최하여 필 리핀에 거주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기도 했다. 故 한덕우 고문은 숭실대(경제 56) 졸업 50주년을 기념 하여, 지난 2011년 모교 장학금 2억을 기탁하기도 했으며, 숭실대는 2015년 한덕우 동문 네이밍 헌정식을 개최하였 으며, 현재 숭실대 베어드 홀 102호 강의실이 ‘한덕우 강의 실’로 명명되어 있어 후배들에게 꿈을 전하고 있다. 故 한덕우 회장은 지난 2014년 ‘제8회 세계한인의 날’에 ‘동포사회의 화합과 모국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故 한덕우 고문의 장례식은 필리핀한인총연합회 葬으로 장례가 진행되며, 빈소는 Heritage Park (Fort Bonifacio, Taguig)에 12월12월까지 운영되고, 12월13일 화장 후 한 국으로 모신다고 유족을 대표하여 상주 한기석씨가 전했다. [마닐라서울 편집부]

양한준(편집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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