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은 자살왕국”이란 자조 섞인 말과 함께 그 통계를 공개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60%가 자살충동을 느꼈고, 암 따위로 인한 병사(病死)나 사고사(事故死) 가운데 자살률이 5%가 넘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히고 있다.
스스로 자기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결심하고, 단행하기까지는 엄청난 고민과 고통 가운데 처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연민의 정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살이 책임을 끝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사후의 세계에서 자기가 행한 자살의 죄에 대한 책임질 것은 자치하고라도 세상에 남겨둔 사람들에 대한 죄를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빚을 해결하지 못해 옥중에서 수삼년을 보낸다고 해도 그리고 삼수, 사수를 하더라도 자기 앞에 놓인 것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것을 그런 방법으로 끝을 내는 것은 결코 책임을 다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세상이 좋아질수록 자살률이 늘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경제의 성장 폭에 비해 정신적인 삶의 수준이 낮은 것이 이유가 아닌가 한다.
책임은 나에게 있다
필자가 군에 있을 때다. 혼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멀리서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가까이 올수록 그 사람의 걸음걸이가 바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다가오는 사람은 이웃 대대의 대대장이었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순찰을 돌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줄 알면서도 정식으로 수하를 했다. “손들어, 누구야?”라고 물었더니 “나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나가 누구야? 손들어!”라고 위협적으로 소리를 쳤다. 그랬더니 보초가 실탄을 장전하고 있음을 아는 터라 즉시 “그래그래”하면서 나의 주문에 따랐다. 그리곤 내 이름을 확인하고 보초를 잘 선다며 칭찬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필자의 대대장이 참모회의를 마치고 돌아와 나를 부른다기에 달려갔더니 “보초를 어떻게 섰기에 2대 대장님께서 칭찬을 다하시냐?”라고 하면서 격려를 했다. 술에 취해 순찰을 돌다가 졸병에게 수치당한 것을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똑부러진(?) 병사를 칭찬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는 책임이나 불쾌함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는 멋진 장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