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정조시대에 한성판윤을 거쳐 병조판서를 지낸 “권 엄”이라는 분이 있었다. “한성판윤”은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시장, 서울지방법원장, 서울가정법원장에 서울고등법원장까지 합친 관직이었다. 어느 날 한성부에 토지인도청구사건이 한 건 접수되어 권 판윤이 심리하게 됐다. 어의(御醫)였던 강명길이란 사람은 자기 부모 묘를 이장하기 위하여 서대문 밖에 있는 임야와 산 아래 있던 민가 수십 채를 사서 농민들과 10월 추수가 끝나면 집을 비워주고 나가기로 약정했는데 그 해 흉년이 들어서 농민들이 집을 비워 주지 못했다. 재판을 할 당시는 겨울이라 새로 집을 마련할 길이 없는 농민들을 쫓아내면 겨울을 나지 못하고 길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는 형편이었다. 농민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권 판윤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했다.
당시 어의(御醫) 강명길은 왕의 은총을 믿고 매우 방자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고 있었다. 강명길은 권 판윤의 판결에 불만을 품고 왕을 찾아가 새로운 판결을 청탁했다. 강명길의 말만 들은 왕은 그 청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다음날 한성부에 새로 제소하도록 하는 한편 승지인 이익운을 불러 강명길이 새로 제소하면 승소판결을 해주도록 한성판윤에게 부탁하라고 하명했다. 강명길은 왕의 부탁을 믿고 다음날 다시 한성부에 제소했다. 권 판윤은 이 승지를 통하여 왕의 부탁을 전해 듣고서도 원고의 청구를 기각해 버렸다. 이에 왕은 크게 노하여 이 승지를 불러 일이 잘못 된 데에 대하여 엄히 꾸짖었다. 왕의 노여움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모두 두려워 떨었다. 이 승지는 다시 권 판윤을 찾아가 왕의 노여움을 전하면서 고집을 꺾고 새로 판결을 해줄 것을 간곡히 권하였으나 권 판윤은 “백성들이 당장 주리고, 추위가 뼈에 사무치는데 지금 쫓아내면 모두 길에서 죽을 것이니 내가 죄를 지을지언정 차마 내쫓아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를 원망하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다음날 강명길이 다시 제소하였으나 판결은 전과 같았다. 모두들 권 판윤이 화를 당하게 될 것 같아 걱정하였으나 수일 후 왕이 이 승지에게 말하기를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 판윤의 처사가 참으로 옳다. 권 판윤은 정말로 얻기 어려운 인재이다. 경은 그렇게 못할 것 같다”고 권 판윤을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한 판사가 초등학교 4학년을 상대로 일일교사를 하면서 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한 여학생만 다른 남학생들의 집중공격을 받으면서도 “권 판윤이 법대로 재판하지 않았으니 옳지 못하다”면서 권 엄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판사는 여학생에게 “장래 훌륭한 판사가 될 수 있겠다”고 말해 주었다.
요즘 한국사회에선 “재판부가 약자들이라는 이유로 피의자들의 편에 서서 큰일을 저지른 사람들마저도 불구속 처리하는 ‘온정주의 재판’을 이어가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권 판윤의 판결과 왕의 동조” 그리고 오늘 한국사회의 “온정주의 재판”은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모두 법 정신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판사는 변호사나 사상가도 아니요 또한 인도주의자(humanist)도 아니다. 다만 법대로만 판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판결은 법대로 하고, 그 다음에 정상을 참작한 감형이나 특사가 필요한 것이 순리요, 상식이리라. 성경에 나타나는 “눈에는 눈”은 인과응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피해자가 과도한 보복조치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한 법적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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