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2007.7.13 (금) 오후: 무거운 결정 (독백)
대사관에서 필리핀 근로자에 대한 비자발급을 일시 보류시켰다. 한국인 소매상을 상대로 한 필리핀 이민청 직원들의 부패행위(금품갈취)를 근절시키기 위해 필리핀 정부에 메씨지를 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소매업(식당 포함)이 이 나라에서 불법으로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를 엄격히 단속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이 나라 정부도 인식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국가이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이나 가게가 있기 때문에 한국관광객이 많고 이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법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여론도 강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민청 직원들이 한국인 소매업소를 상대로 ‘불법영업’이라는 핑계로 돈을 갈취해 왔었다. 최근 2-3주는 극심해져 한국인 업소들이 불안에 떨고 있고 교민사회 전체가 뒤숭숭해 있다.
한국인들이 필리핀 이민청 부패공무원들에게 희생되는 것을 대사관이 그냥 좌시할 수는 없어서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좀 더 부드러운 해결책을 끝내 찾아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한국이 필리핀에 대해 고압적”이라는 부정적 인상을 주지 않고서 무사히 끝나야 할 텐데... 양국간의 외교관계에 부담을 주지는 않아야 할 텐데...
II. 2007.07.19 (수) 오후: 이민청 Almoro 차장과의 면담 (대화)
Almoro 차장이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해 왔다. 이를 받아들이면서 비자발급 보류 조치를 즉각 풀겠다고 약속하였다. 마침내 이민국 일부 직원들의 부패행위로 인한 한국교민의 피해 가능성을 차단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민청이 약속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한국교민의 원성의 대상인 기존 정보과 직원(100여명)은 이민청장의 Mission Order 를 집행하는 업무에서 배제하고 명부가 공개된 15명으로 구성된 전담반을 새로 설치한다.
2. Mission Order 에는 반드시 대상자와 구체적 혐의 내용을 명시하며, 이민청장이 서명한 Mission Order 만이 유효하다. 월권하는 직원은 징계에 회부한다.
3. 한국대사관과 이민청장실 간에 Mission Order 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한 핫라인을 설치한다.
4. 한국인 소매업자를 연행할 때는 한국인 상공회의소에도 통보한다는 한국측 제안을 호의적으로 검토한다. 이제는 한국대사관의 조치가 불가피하였음을 필리핀 언론과 국민에게 홍보하고 필리핀 정부의 anti-corruption campaign 에 한국대사관이 일조한 것이라고 설득시키는 일이 남았다.
III. 2007.07.23 (월) 오전: ‘마닐라 서울’ 주최 “Knowing Korean Community” 행사에서 (필리핀 언론과의 대화)
“한국대사관은 이 나라에 와 있는 손님에 불과합니다. 주인을 겨냥한 보복행위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굳이 보복행위가 필요하다면 대사관을 파견한 국가의 수도에서 조치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양자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 이 나라에 위험신호를 보내는 것은 분명 대사관의 역할입니다. 이번에 한국대사관은 그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필리핀에 있는 한국인 소매업자에 대한 과잉단속은 곧 바로 한국에 있는 필리핀 불법근로자에 대한 단속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특정국가의 국민을 상대로 조치를 할 때는 후유증을 감안해야 하는데, 그 점이 간과되고 있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법을 급변하는 경제현상에 일률적으로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것은 국익을 위해 건전하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필리핀 ‘불법’ 근로자를 겨냥하여 단속하지 않는 것은 우방국 간에 우선적 과제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에서는 한국인 소매업소를 단속하는 것이 왜 그다지도 중요할까요?”
“그러나 이번에 대사관에서 필리핀 근로자에 대한 사증발급을 보류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차이’ 때문은 아닙니다.
공권력 행사기관의 권력남용에 의한 harassments 와 extortions 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비자문제를 이유로 밤 11시에 총기를 휴대하고 집으로 찾아 와서 돈을 요구하거나 종교적 성역인 사찰까지 침범하는 것은 정당한 공권력 행사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개인적으로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외국인’이라는 취약한 신분 때문입니다. 한국대사관의 요구는 권력남용과 부패를 막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대사관은 필리핀 정부의 ‘재발방지’ 대책 설명을 듣고서 이의 실행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신속하게 비자발급을 재개하였습니다. 필리핀 근로자들의 불안감을 한시바삐 해소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태는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그마한 bump 였고, 결국 상호협력을 통해 잘 극복하였다고 봅니다.” (끝; 이 글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sungmog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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