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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최고의 화상 기업경영인 ‘천용재’

필리핀 경제이야기—세번째

등록일 2007년06월29일 15시58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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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일자: 2007-06-29
 

저번 주에 이어 계속해서 필리핀에서 활동중인 중국인들의 경제적 영역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부의 축적과정과 개인적 기업인들의 경영인생의 과정을 살펴보았으면 한다.

필리핀이라는 아직까지 가난한 나라에서 필리핀 드림을 이룬 중국인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또한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들이 원하는 꿈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가 생각해보자.

필리핀 경제 활동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내는 기업가 중 필리핀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 화상기업경영인 중에 영향력 10위 안에 드는 사람인 천용재라는 (천용짜이) 실업인을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가 이룩한 인생의 역경은 바로 하나의 기적과 같은 과정을 거쳐 왔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현재의 부와 명예를 소유한 영향력 있는 기업인으로써 그는 고난의 연단을 거쳐 지금은 찬란하게 피어나는 정금 같은 인생을 맞이하고 있다. 그의 인생 과정 가운데에는 필리핀에 사는 우리에게 많은 도전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귀한 경험담들이 많이 있다. 현재 그의 나이 70세에 아시아 부호 12위, 필리핀 부호 1위의 숫자는 그의 필리핀에서의 기업활동의 영향력을 말해준다. 그는 필리핀 에어라인, 주조장, 은행, 병원, 비행장, 농장, 호텔 등을 소유하고 있는 대기업 경영인이면서 여전히 그는 왕성하게 더 넓은 땅을 향해 비행하고 있다.

천용재는 1934년 중국 복건성에서 담배공장에 다니던 노동자인 아버지 슬하에 태어났다. 당시 일본의 중국침략으로 복건성 일대가 일본의 점령지역으로 민생이 불완전한 시국이었다. 4살이었던 그는 아버지를 따라 필리핀으로 도피했지만 아버지의 병환으로 또다시 고향으로 귀환, 그리고 삼촌을 따라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겪었다. 열 한 살 되던 때 가정의 경제적 책임을 져야 했던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담배공장에서 일을 하며 가정을 돌보았다.

   그는 낮에 일하고 밤에는 독학으로 공부를 하며 중학교 과정을 마치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FEU의 화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화학 회사의 연구조수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54년 그는 친구들과 함께 옥수수 원료를 만드는 공장을 토대로 합작회사를 설립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공장문을 닫게 됐고 이런 첫 실패의 경험에서 그는 자신의 의지력과 도전정신에 늘 긍정적인 사고를 잊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일이든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가 있는 양면성이 있다. 중요한 건 안 좋은 조건을 어떻게 좋은 조건으로 바꾸는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행동했다.

실패의 어려움 속에 그는 정유회사와 화학원료회사를 설립하여 조금씩 돈을 모았다. 1965년 천용재는 마닐라 주변의 땅을 구매하여 담배 제조공장을 세우게 됐지만 1968년 당시 태풍으로 인해 공장은 물에 잠기고 모든 기계가 폐처분의 위기까지 가게 됐다. 그는 전심전력으로 직원들과 함께 공장 기계들을 수리하기 위해 밤낮을 쉬지 않고 복구 작업을 했다. 담배제조공장을 시작할 때 기계 2대로 시작해서 주 생산품목인 박하향 나는 담배를 생산하면서 조금씩 기금이 생기자 생산품목을 늘렸다. 하지만 브랜드 인지도에서 다른 제품과 경쟁할 수 없어 한 때는 공장을 닫아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가 세운 담배제조공장은 그의 사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초를 다지는 회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철저한 시장조사와 브랜드 이미지를 통한 현지화 전략으로, 흑색 상표를 홍색으로 바꾸고 공장을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에 설립하게 되는 전환점을 맞았다. 이것을 기점으로 70년대 말 필리핀 최고의 담배제조회사로 70~80년대 담배시장을 장악하게 됐다.

1979년 그의 복천 담배 제조 공장에서 개발한 상품이 제 13회 프랑스에서 열리는 담배 품평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국제시장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무렵 독자적인 브랜드와 함께 국제적 담배회사로 성장하게 됐고, 그때부터 그에게는 동남아 담배대왕이라는 닉네임이 따라붙었다.

70년을 기점으로 그는 국제 무역 및 부동산, 야자원료공장, 비누, 전자,정유, 양식장 등 상품의 자회사를 설립했으며 80년대는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려 국제 금융시장에 뛰어들었다. 홍콩에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하고 미국 시장을 개척해 미국해양은행을 설립하게 됐다. 그의 투자는 계속 해서 중국과 아시아 지역에 다각적으로 상장기업을 설립함으로써 필리핀 최고의 화상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경영철학은 중국 철학자인 노자의 변증학적 사고의 영향에 따라 인생경영 마인드를 설립하고 삼국지에서 나오는 전략과 전술에서 경영의 상술과 응용된 방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역사와 지리서를 통해 시장의 흐름에 대한 안목을 증가하고 중국 고전 및 역경과 같은 중국 철학 서적들을 통해 경영 리더쉽에 뛰어난 실력을 지니게 됐다. 그는 담배와 술을 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 근면을 중국 사람이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꿈도 근면생활을 통해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시련과 고난 속에도 시들지 않은 열정과 도전정신, 용기를 통해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우리도 지금 살고 있는 이곳 필리핀이라는 땅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자신에게 오는 소중한 기회를 잘 이용하여 성공적인 인생경영자가 되기를 바란다.

김정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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