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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규 컬럼] 8. 성공과 실패의 순간들

등록일 2007년02월22일 15시08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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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일자: 2007-02-22
 

 

인생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들로 말미암아 환희와 기쁨을 느낄 때도 있지만 때로는 깊은 상실감과 절망으로 인하여 낙심할 때도 있게 마련입니다.
사업을 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뜻 한대로 사업이 잘 진행되면 성취감이 대단하지만, 잘 될 것 같은 일들이 잘 풀리지 않고 꼬여서 흐지부지 되어 버리거나 혹은 사업의 실패로 말미암아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될 때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30대 후반에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독립적으로 내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수십 년간을 성취의 기쁨과 실패의 고통 사이를 오가면서도 이제껏 꾸준히 사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사례별로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1. 장사는 장사꾼과.

직장을 그만둔 후에  1년간은 나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삼고 동남아 시장을 돌아보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첫 번째로 태국을 다녀온 다음에 방글라데시를 찾았습니다.
20여년 전이다보니 방글라데시는 개발이 안 된 최빈국 중의 하나로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고, 도무지 무엇 하나 제대로 자리 잡은 것이 없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나라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도시 국가를 제외하면 인구 밀도가 제일 높은 빈민국 중의 빈민국인 나라의 수도인 다카는 도로 사정은 말할 것 없고 번듯한 건물은커녕 길거리엔 거지 떼 때문에 마음 놓고 길을 걸을 수조차 없는 한심한 곳이었습니다. 교통수단으로는 릭샤(자전거 뒤에 서너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든 것)라는 것이 있는데 자전거에 서너 사람을 태우고  운전자가 폐달을 발로 돌려서 가는 것이니 속도를 낸다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냥 끌고 가는 것만도 중노동이라 보는 사람이 딱할 정도였습니다.
길을 가득 메운 릭샤를 보면서 내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릭샤에 모터를 달아주면 운전자가 힘도 훨씬 덜 들고 또한 속도도 어느 정도는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상세히 조사해보니 미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에 이와 유사한 용도로 모터를 이미 수출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소형 모터는 자전거에 달아서 리크레이션 용으로 수출되고 ,대형 모터는 (약 5HP로 기억됨) 릭샤와 같은 것에 부착하여 쓰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제조업체와 가격을 조정하고 직접 릭샤를 만들어 시험 운전을 해 본 후에 방글라데시에서 일면식이 있는 노동부 장관에게 수입 의사를 타진하였습니다. 노동부 장관으로부터 답신이 오길 이 사업에 관심이 많으며 자기가 직접 나와 파트너로 일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입상을 자신이 알아보고 판매 또한 자신이 맡아서 해보겠으니 나에게 일차로 다카를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샘플을 몇 개 준비해 가지고 다카로 가면서 그 많은 릭샤 만큼 모터를 팔 생각으로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다카에 도착하니 장관 비서가 공항에 나와서 나를 맞이했습니다.
장관을 만나 사업에 대한 여러 가지 협의를 하였습니다.
곧 모터를 수입하겠다기에 가격도 적정선에서 합의를 보았으며 신용장 거래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샘플로 가지고 간 모터를 두 대의 릭샤에 부착하여 거리를 달리게 하니 광고 효과도 대단하였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방글라데시로부터 곧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아무 소식이 없기에 답답하여 연락을 해보았더니 좀 기다리라는 답뿐이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에 그쪽에서 연락이 오기를, 마케팅 비용이 필요하니 지원을 해 달라는 등 방글라데시에서 조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등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알게 된 것이 장사는 장사꾼과 해야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몸으로 뛰며 열심히 일하지만 ,정치인은 몸은 움직이지 않고서 혀끝으로만 돈을 벌려 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물론 이 사업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일찍 접어야만 했습니다.

2. 철저한 조사가 바로 성공의 길.

직장에 다닐 때에는 출장을 다니더라도 해야 할일이 뚜렷하여 정해진 일정대로 다니며 현지 지사로부터 여러 가지 배려와 혜택을 받지만 직장을 그만 둔 후에 뚜렷한 일정도 없이 가방 하나 달랑 들고서 여러 나라를 다니자니 때론 지치고 외로운 마음이 들곤 하였습니다.
방콕을 중심으로 몇 군데를 둘러보고 날이 저물어 호텔로 돌아가는 길엔 왠지 서울에 있는 가족 생각도 나서 마음이 울적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종일 이리저리 다니면서 볼일을 보고나서 걸어서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오는 중 길거리에서 파는 쌀국수(기떼오) 한 그릇을 시켜서 먹는 중에 쌀국수 국물을 끓이느라 피운 숯불의 불빛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내 머릿속에서 불현듯 사업의 아이디어가 하나 퍼뜩 떠올랐습니다.
한국은 나무를 베지 못하게 단속하니 숯이 부족할 것이란  생각이 든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내가 알고 있는 태국의 한 회사에 찾아가서 숯의 가격을 알아보고 몇 가지 종류의 숯 샘플을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그 자료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목탄협회라는 곳을 찾아가서 숯의 수급 상황과 가격을 조사했습니다.
숯의 실수요자도 파악하였습니다.
태국에서 가지고 온 숯 샘플의 열량도 분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한 가지 종류의 숯을 선택한 후 태국에 연락하여 포장 방법과 해상 운송비, 관세 등을 면밀히 조사한 후 숯 중간 도매상을 찾았습니다. 샘플을 주고 가격을 제시하자 그들이 직접 실험을 해본 후 연락이 왔습니다. 수입 가격이 국내 가격의 25% 수준이라 두 컨테이너 물량의 숯을 수입단가의 3배의 가격에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익이 많으면서도 별로 힘이 안 드는 사업을 우연히 개발한 경우입니다.

3. 사업의 아이디어는 어느 곳이나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실렛을 여행할 때입니다.
한적한 곳에 위치한 푸른 Tea Garden을 지나는데 뱅갈어로 부르는 노래 소리가 크게 들려 왔습니다.
찬찬히 주위를 살피니 현지인이 큰 카세트를 어깨에 메고 음악 테이프를 틀어서 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소니가 개발한 워크맨 시대를 지나서 MP3가 널리 보급되었지만 그 시절은 덩치 큰 카세트 시대였습니다.
‘카세트를 자랑하기 위하여 들고 다니면서 저렇듯 남들 앞에서 크게 음악을 틀려면 배터리가 필요할 터인데 ---’ 라는 생각이 얼핏 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그렇다. 배터리를 팔아보자.”라는 생각을 갖고 방글라데시 시장은 접근이 어려우니 태국 시장을 조사해 보자는 생각에 태국으로 다시 돌아와 시장 조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일본 제품들이 태국 시장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제 배터리 가격과 수요량을 조사한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일본 제품과 한국 제품을 비교 분석하니 한국 제품의 성능이 일본 제품의 80% 성능 정도였고 한국 배터리 가격이 일본 제품의 80% 수준이었습니다.
나는 한국 회사로부터 독점 판매권을 받아서 태국에 국산 배터리를 수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나는 요즘 출장 중 앙증맞은 사이즈의 MP3를 가지고 다니며 음악을 감상합니다.
지금도 가끔 커다란 카세트를 어깨에 메고 다니며 음악을 틀던 방글라데시 청년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곤 합니다.

4. 공룡을 이길 수는 없다.

이럭저럭 사업의 발판을 만들어 가던 시기에 나는 태국 업체로부터 사업 제안을 받았습니다.
내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한 경력을 알고 있는 태국인들이 사우디와 태국을 연결하는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태국에 있는 큰 장비 업체 10여개가 연합하여 사우디에 있는 중고 중장비를 태국으로 수입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들의 제안에 대단한 흥미를 느낀 나는 즉시 사우디아라비아로 출장을 갔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유럽의 한 회사와 접촉을 하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중고 장비를 즉각 팔겠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의 한 건설 회사도 가지고 있는 중고 장비를 팔겠다는 의사 표시를 해 왔습니다. 이 두 회사는 대형 건설업체로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 시장을 주도하던 회사였으나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 경기가 하향세를 지속하자 가지고 있던 장비 처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었기에 당연히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많은 물량의 중고장비 리스트를 가지고 태국으로 돌아와 태국의 장비업자들에게 수입할 물건들을 선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리스트에 올라있는 대부분의 장비들을 구입할 의사가 있음을 알려왔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여 장비 검사를 하고 두 회사로부터 물건의 가격도 받았습니다. 태국의 장비업자들은 만족해하며 대부분의 장비들을 사겠다고 합의서를 작성한 후 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태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그들과 정식 계약서를 작성 중이었고, 장비업체는 은행과 절충하여 수입자금에 대하여 신용을 얻고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챤스를 잡았으므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일본의 장비업체가 동남아 시장을 점유하여 일본에서 사용하던 중장비들이 동남아로 수출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미숙하여 시장을 움직이는 공룡의 힘을 모르고 덤빈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일본의 업체들이 태국 정부를 움직여 외국에서 들여오는 중고 장비의 관세율을 갑자기 20%에서 80%로 인상시킨 것입니다. 높아진 관세로 말미암아 외국으로부터 중고장비의 수입이 어렵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무산되었습니다.
나는 공룡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순간에 공든 탑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한 케이스였습니다.

5. 봉이 김선달식 장사.

사업을 하다보면 봉이 김선달식 장사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업을 하던 중에 국내의 한 회사가 물공장(해수를 담수로 처리하여 식수로 사용하기 위하여 건설되는 공장)을 수주하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공사의 규모가 엄청나게 클 뿐만 아니라 상당한 기술력도 필요한 공사였습니다. 어느 날 나는 시간을 내어 잘 알고 지내던 학교 선배인 지사장을 개인적인 용무로 찾아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그가 나에게  화학 기호가 나열된 서류를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모른다고 대답하니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물을 정수 처리하는 과정에 들어가는 작은 자갈돌인데 많은 양의 돌이 필요하고 급하다면서  이태리에서 수입하여야 하니 나에게 좀 알아볼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서류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곧바로 내가 알고 지내는 Chemistry인 독일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 친구는 화학 기호를 보고 나더니 빙긋이 웃으며 하는 말이“ 네가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돌이 사우디 어느 지역에 깔려있으며 물론 이 돌을 잘게 부수는 공장(Crushing Plant)도 그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공장의 책임자인 독일인 친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돌 값이 사막에서 퍼오는 흙값 보다는 조금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이태리에서 수입하는 돌의 가격과 비교하니 겨우 10분지 일 가격이었습니다. 나는 공장에서 받은 가격의 7배의 가격을 받고 돌을 팔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태리에서 수입하는 가격보다는 30%나 싼 가격이었기에 거래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입니다. 이런 장사가 바로 봉이 김선달식 장사입니다.

6. 아는 것이 힘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 자재 장사를 할 때의 경험입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잡자재는 취급하지 않고 미국과 유럽의 몇 개 나라 그리고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주자재를 수입하여 팔았습니다. 그리고 일부 품목은 사우디아라비아 현지에 있는 공장으로부터 물건을 공급 받아서 건설 현장에 납품도 하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 공사는 어느 나라의 설계 회사가 설계를 하며, 어느 나라 사람이 공사를 감리하느냐에 따라서 자재의 선택이 달라집니다.
그 당시엔 미국 사람이 설계하고 감리하는 공사가 제일 많았으니 당연히 미국 자재 우선으로 설계되고 공사에 미국에서 생산되는 자재를 우선적으로 써야만 했습니다.
그 다음이 영국, 독일, 프랑스 순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나라별로 사양이 서로 달라서 자재의 기준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계 자재마다 자국의 표준을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군사 기지는 미국의 사양에 맞추어 건설 되었고 , 미 공병단이 설계, 감리를 담당하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에 레이더 기지를 건설할 때입니다.
유럽 계 회사가 대부분 공사를 수주하였고, 한국 회사들도 일부 수주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나와 친분이 있는 세계적으로 큰 회사인 홀랜드계 회사도 공사 일부를 수주하였습니다.
어느 날 업무 차 홀랜드 계 회사를 방문하였더니 나에게 신규로 수주한 레이더기지 공사의 자재 공급을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공사의 B,O,Q( Bill of Quantity. 자재소요 물량표)를 카피하여 주면서 검토를 속히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로 돌아와서 품목별로 검토하여 통상적으로 공급하는 자재와 특이한 자재로 분류하였습니다. 자재 중 큰 금액을 차지할만한 자재는 전기선과 PVC파이프였습니다.
전기선은 우리 회사가 사우디내의 공장에서 판매대리권을 갖고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가장 큰 금액을 차지하는 PVC 파이프는 미국인이 설계하였으므로 당연히 미국의 표준(ASTM)을 따른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미국의 표준인 일부 품목은 구식이어서 인치(Inch)단위를 사용하여 미터법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매우 불편한 것들이 많았지만 미국인이 설계하고 미국인이 감리하며 미국의 장비들이 설치될 예정이니 미국식 표준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수출국이며 석유화학 제품을 많이 생산하는 국가여서 큰 PVC 공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PVC 파이프를 멀리 미국에서 사와야할 처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곰곰이 생각하다가  잘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다고 판단하여 나는 한 번 모험을 해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 공사는 시전을 공급하기 위하여 산 위에 건설하는 공사로써 레이더 기지까지 6개의 전선을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현장이 원거리로 이동하여야하므로 엄청난 물량이 소용되는 공사인 것입니다.
우리 회사가 이미 판매 대리권을 갖고 있던 PVC 공장을 찾아가 미국 사양을 인쇄하여 Catalogue에 부착하겠다고 제의하였습니다. 미국의 사양에 맞는 PVC를 생산하는데 사용되는 Mold를 내가 공급하겠다고 제안하니 몰드만 바꾸면 생산에는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이태리와 한국에서 Mold를 각각 2개씩 사오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사양에 맞는 Catalogue 인쇄를 의뢰하였습니다.
발주한 몰드가 도착하여 PVC 파이프 샘플을 생산하고 인쇄한 카탈로그를 감리 회사에 제출하여 승인을 요청하였습니다.
제조원은 물론 PVC 사우디 공장이며 내가 운영하는 회사가 공급회사로 요청한 것입니다.
2주 후에 감리회사의 미국인이 전화를 걸어 내가 제출한 모든 서류들이 순조롭게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면서 Green Light Signal을 나에게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PVC공장과 여러 차례 협상 끝에 나에게 30%의 Margin이 보장되었습니다.
미국에서 PVC 파이프를 직접 수입하게 되면 우선 선임이 제일 문제인데 그 이유는 부피만 크고 값이 많이 나가지 않는 자재이므로 물건값보다는 선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국 산업 보호 정책으로 말미암아 자국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수입할 경우에 최고의 관세를 부과하므로 이런 조건들을 감안하면 이 품목의 수입가는 현지에서 생산되는 가격의 3배가 넘는 것입니다.
나는 현지에서 생산되는 물건으로 승인을 이미 받았으므로 원가의 270%에 해당되는 가격을 제시하였는데 협상 끝에 20%의 가격을 깎아주고 마침내 큰 금액의 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내가 PVC 공장에 Delibery를 요청하면 즉시  PVC 공장에서 파이프가 생산되어 현장으로 직접 납품되었으며 신용장으로 거래하므로 물건 판값을 내 구좌로 입금만 받으면 되는 사업이었습니다.
내가 미국 표준 (ASTM)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이 사업은 성사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임을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하는 경우였습니다.

몇 가지 사례별로 나의 경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만 내가 지금도 사업을 계속하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한계는 젊은 세대와 달리  Softwear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컴퓨터 세대의 사람들에게 이 분야에서 뒤지는 것이 가장 큰 핸디캡입니다.
젊은이들이여!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모름지기 탄탄한 실력을 길러서 세계를 무대로 과감하게 도전하여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루도록 노력하기 바랍니다.
사업은 아무나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작은 실수나 실패에 연연하여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끈기와 인내와 실험정신으로 굳세게 정진한다면 반드시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성공만이 재산이 아니라 원치 아니하는 실수나 실패도 커다란 재산임을 이야기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김정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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