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0년 전의 일이다. 창설부대요원이 된 덕에 군종사병으로 잠시 편한 세월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런데 나 보다 그 부대에 늦게 전입을 온 군목께서 계급과 상관없이 훨씬 먼저 와있는 나를 부대전입 선배(?)로 생각했는지 많은 권한을 주어서 어깨가 으쓱한 나머지 부대의 각 부처를 휘저으며 군목님의 업무를 수월하게 해드렸다. 거기 까진 좋았는데 몇 가지 사심을 부려놓은 것은 일생의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제대를 얼마 앞둔 시점에서 몇 달 간격을 두고 후임병 둘을 선택해야 했는데 그것을 군목께서 직접 하지 않고 나에게 맡긴 것이다. 나는 많은 신병들의 신상명세서를 들추다가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를 다니다가 온 사람을 뽑았다. 또한 나의 제대 직전에 선택된 사람도 역시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 재학생이었다. 나는 제대하면서 그들에게 “우리 부대의 군종사병은 이런 식으로 장로교 신학생으로 이어가도록 하자.”고 말하는 것을 않았다. 배운 것이 고작 보수주의 장로교였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발상이요, 부탁이었던 것이다.
한번은 성탄절을 맞아 장병들에게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군목께서 부대장의 허락을 받아 크리스마스카드 경연대회를 가졌다. 일등에게는 한 주일 휴가 또 이등과 삼등에게는 며칠의 휴가를 주는 꽤나 큰 행사였다. 많은 출품작 중에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미대를 졸업하고 온 ROTC 장교가 화젓가락으로 그린 쌍 백마, 하사관이 대패밥 위에 그린 여인 그림 등 오래도록 보관해도 좋을 명작들이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런데 일등 시상이 그런 명작 중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조잡하기 짝이 없는 크레파스로 그린 유격훈련 받는 모습이었다. 그 그림 실력은 초등학생 수준이었는데 그 그림이 일등의 영예(?)를 안은 배경은 다음과 같다. 나의 훈련 동기 중에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 그림을 출품해 놓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꼭 집에 다녀와야겠다.”며 통사정을 했다. 때로는 먹을 것을 들고 오기도 했다. 나는 부대의 수뇌부들에게 전시한 후 그 그림들을 즉시 치워버렸다. 일등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그래서 그 가장 조잡하게 그려진 것이 일등이 된 것이다. 그 일에 대해서 군목님 사모님께서 “임 병장이 일등했군요.”라는 뼈있는 한 마디 외에는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탄절이 다가오니 성탄절과 관련된 예전의 일이 생각나서 부끄러운 고백을 했다. 아무튼 나는 누가 코드인사를 하든, 어떤 감투를 쉰 떡 퍼 돌리듯 하든지 아무 할말이 없는 사람이다. 내게 그런 권한이 주어지면 나는 더 그럴 테니 말이다.
2006,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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