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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자의 사람香] “농구는 내 인생”

이상면 농구코치

등록일 2010년09월20일 18시14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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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일자: 2010-09-20
 

 

삐~익!

“오케이. 잘했어, 잘했어. 나이스 패스~”

“00야, 이왕 치고 들어가는 거, 자신 있게 치고 들어가, 알았지?”

 

지난 9월9일(목) 오후 4시, 필리핀한국국제학교 강당에는 한국학생들이 연신 땀을 훔쳐가며 농구 골대에 슛을 넣는데 여념이 없다. 적은 인원 수이나 농구경기에 열중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막하의 승부를 펼치는 가운데도 이들은 중간중간 들려오는 이상면 코치의 지도에 따라 움직인다.

 

이상면 농구코치(29)는 필리핀대학농구리그(NCAA)에서 농구선수로의 3년간 활동을 마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변신했다. 3년간 그가 가르친 학생 수만 해도 정확히 1725명. 앞으로도 더 많은 학생들에게 농구의 매력을 전파할 예정이다.

기자는 농구인생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이상면 농구코치를 만나 그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를 들었다.

 

촌스러운 유니폼에 홀딱 반해

“농구를 하게 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예요. 어릴 때 운동을 엄청 싫어했는데 아버지께서 농구선수인 삼촌(김대의: 현 LG코치로 활동 중)이 계신 농구장에 데리고 가서는 ‘너도 저렇게 운동하고 싶지 않느냐’고 말하셨어요. 그때 제 눈에 비친 농구 유니폼은 너무 멋져 보였어요. 어떻게 보면 유니폼이 좋아서 (농구를)시작한 것 같아요”

 

파란 색깔의 옛 농구 유니폼은 핫팬츠처럼 바지가 짧고 긴 양말을 무릎까지 올려 신어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촌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그 유니폼을 보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이상면 코치가 되지 않았을 듯.

 

“체육 특기생으로 중학교를 들어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농구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어요. 그저 친구들이 좋고 정이 들어서 헤어지기 싫어서 농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정작 그가 농구를 열심히 하게 된 데는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부터다. 집안의 경제 사정도 기울어지면서 부모님은 필리핀으로 이민을 했다. 한국에 혼자가 된 그에게 남은 건 농구. 열정을 쏟아 붇지 않을래야 안을 수 없는.. 농구는 늘 그와 함께하는 고마운 친구가 됐다.

 

명지대 농구선수로 활약

2001년, 명지대학교에 입학한 이상면 코치는 대학농구선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대학에서 농구특기생으로 들어갈려면 왠만해서는 쉽지가 않다. 경쟁률은 300대 50. 모두다 농구에 목숨을 걸고 그동안의 실력을 쌓은 터라 농구특기생이 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할 수 없다고 한다.

힘든 경쟁률을 뚫고 들어와 활약하는 그에게 앞으로의 장래는 탄탄했을 듯.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비는 그를 너무 힘들게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크게 다리부상을 입어 3개월 가량 쉬어야 했어요. 단 한번도 사고를 당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가 처음이었죠.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피할려고 피한게 군대를 갔어요. 해병대에 지원했죠. (웃음)”

 

2년 반, 대한민국 젊은이로서 국가 의무를 잘 수행하고 다시 명지대에 복학한 그에게 뜻하지 않은 새로운 제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필리핀에서 농구선수로 활동하는 것.

 

“한국에서 대학농구선수는 모든 대학 수업에 참석하지 않아요. 오직 농구만 하죠. 그러다 보니 교육 면에서는 부족한 게 없지 않게 많아요. 요즘도 가끔 다른 나라와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외국인과 커뮤니케이션이 굉장히 원활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대한농구협회(KBA)는 1년에 한두명씩 본국에서 후원해서 외국으로 보내는 게 있어요. 처음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간 선수가 지금 서울SK의 방성현 선수죠. 저도 은사님과 박현모 회장(비한문화재단 회장)님의 추천으로 대한농구협회에서 후원을 받고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필리핀에 오게 됐어요”

 

필리핀에서의 새로운 시작, 어려웠다.

 

 

 

 

 

 

 

 

 

 

 

 

 

 

 

2005년 필리핀에 온 이상면 코치는 아테네오 농구팀에서 선수예비생(Resident)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외국인으로서 첫 발을 디딘 필리핀 농구계는 그의 각오와 다르게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그를 가장 고민하게 한 것은 UAAP 외국인 선수 규정과 언어장애였다.

 

“필리핀대학농구리그는 UAAP와 NCCA로 나눠져요. 제가 다녔던 아테네오 대학은 UAAP소속이죠. 그런데 UAAP 규정상 외국인 선수는 2년간의 레지던트 훈련을 마친 후에 선수로 뛰게 돼 있어요. 저는 대학교 2학년으로 편입을 했는데 2년간 레지던트 훈련을 마치고 나면 졸업생이 되어서야 1년 정도 대학농구리그에서 뛸 수 있게 되는 거죠”

 

한국에서는 그래도 선수로서 생활을 했는데 다시 예비생으로 시작해야 하는 데다가 2년간 어떠한 경기에도 참가할 수 없다는 게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거기다가 제가 레지던트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UAAP측에서 외국인 선수예비생을 2년에서 3년으로 바꿨을 때 고민 많이 했어요”

필리핀서 본격적인 농구생활

2년간 훈련을 마쳐도 1년간 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 기회가 없어지자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민하던 끝에 그는 아테네오 대학에서 Perpectual 대학으로 또다시 편입을 한다. Perpectual 대학은 UAAP가 아닌 NCAA리그에 속해있고 NCAA의 외국인 선수 규정은 다행이 1년만 예비생 훈련을 마치면 선수로 뛸 수 있게 돼 있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졸업할 때까지 3년간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한국농구는 솔직히 선후배 사이의 위계질서가 강해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대회를 나가도 제가 하고 싶은 데로 운동을 못해요. 기회가 와도 선배들에게 공을 넘겨야 하고요. 반면에 필리핀은 굉장히 자율적이죠. 저는 그것도 모르고 처음 1년은 쩔쩔 맸어요. 그런데 지내다 보니 그런게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 찬스에 제가 원할 때 언제든지 골을 넣을 수 있다는 데 많이 놀랬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보다 득점도 많이 했고 전후반전 경기를 풀(Full)로 뛸 수도 있었고.. 농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선후배 관계에 갇혀 있었던 운동을, 열고 하니까 실력도 늘고 리더쉽도 생기고.. 졸업하기 2년 전부터는 외국인 선수인데도 불구하고 팀 주장까지 했어요. 한국에서 하지 못했던 경험을 많이 한 것 같아요. 환경으로 따진다면 제 개인적으로는 한국보다 필리핀이 운동하기는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보다 필리핀에서 농구를 더 즐겼지만 외국인이라 어려웠던 부분도 있었다.

 

“한국과 달리 필리핀에서는 운동량이 줄어들다 보니까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어요. 남들과 운동하는 시간에 같이 운동하고 끝나고 나서도 개인연습시간을 가지면서 연습하니까 코치가 저를 많이 예뻐하고 잘해줬어요. 그러니까 필리핀 친구들이 질투를 많이 하더라고요. 어느날 게임에서 필리핀 친구들이 제게 패스를 안하는 거예요. 한두번도 아니고… 저도 어린 마음에 속상해서 리그 중에 술을 엄청 많이 마셨어요.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에 운동 연습하러 갔는데 아무래도 제게서 술냄새가 나잖아요. 그러니 코치가 ‘너 나가 앉아있어’ 하고는 한달 동안 연습을 안시키더라고요. 단 한번도 혼나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현지어(타갈로그) 공부를 많이 했어요. 영어로 사용해도 팀선수들과 가까워지긴 어려운 것 같거든요. 당시에는 운동하는 시간보다 현지어를 공부하는 시간이 더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현지어를 잘하는 편이예요. 현지어로 의사소통이 되니 팀선수들도 이제 저를 인정해주더라고요. 농담도 서로 해가면서 마음을 열고요”

 

그는 타갈로그를 배우면서 사랑과 우정을 한번에 잡았다. 타갈로그로 대화하면서 팀동료들과 친해지고 배우면서 가르쳐 주던 친구와 결혼까지 골인하게 됐다고 한다.

 

농구코치로 제2의 농구인생 시작~

2007년 Perpectual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상면 코치의 즐거웠던 필리핀대학농구선수생활도 마감을 지었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그는 한국에서 다시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차에 이번에도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부모님께서 필리핀에 오래 사시다 보니 부모님 편으로 학생들 좀 데리고 농구수업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저는 이때껏 운동을 하면서 ‘선생’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해봤고 늘 ‘선수’라는 것 밖에 몰랐는데 가르쳐야 한다니까 제 자신 스스로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가르치면서 부족한 게 많았는데 그 부족함을 아이들에게서 많이 배우고 채웠어요’

“3년간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니까.. 내가 몇 명이나 가르쳤나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일이 세어보니 1725명의 학생들이 저를 지나갔더라고요. 지금 가르치는 친구들도 200명 정도 되는데.. 그 친구들이 제게 필리핀에 남아야 된다는.. 그런 존재감을 심어주는 것 같아요”

 

이상면 코치는 필리핀한국국제학교, 이클라 국제학교(파라냐케 소재), Perpectual 고등학교 농구수업을 맡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건 이상면의 농구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이상면의 농구교실은 케존, 그린힐, 올티가스, 보니파시오, 마카티, 파라냐케, 알라방, 라스피냐스 등 메트로 마닐라 전 지역을 돌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일주일 스케줄은 언제나 빡빡하다. 그중에서 하이피크는 금,토,일요일이다. 학생들의 95%는 한국인이고 나머지 5%는 영국, 중국 등의 외국인이 참가한다.

 

“일 자체는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해요. 금요일 같은 경우, 이동시간까지 포함하면 16시간 동안 수업을 하니까 잠을 잘 못 잘 때도 있거든요. 피곤하고 도저히 수업을 못하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아이들을 보면 ‘아, 해야지’하는 마음이 들어요. 그러나 가정이 있다 보니까 주말에 시간을 못 내는 것을 가끔 (와이프가)이해하지 못할 때는 조금 힘들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팀웍’이다. 그리고 그가 가장 용납하지 못하는 부분은 ‘예의 없는 행동’을 할 때다.

 

“농구는 아무래도 팀웍이죠. 아무리 혼자 개인기가 뛰어난다고 해도 지면 15명 선수 모두가 지는 거고 이기만 모두가 이기는 거니까요”

“수업 중에 가끔 어머니들께서 관람을 하시는데 학생들이 부모님께 반말을 한다던가. 유니폼을 벗고 오랬더니 유니폼을 던지고 온다던가 그러면 단체로 벌을 받아요. 저는 예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의가 있다면 운동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이거든요. 예의 없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제 수업에 참석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아예 받지도 않습니다”

 

어느 누구나 농구 좋아하는 교민 사회 만들고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엄격하게 가르치는 이상면 농구코치의 앞으로 꿈을 물었다.

 

“먼저는 농구교실을 늘리는 겁니다. 앙헬레스 지역에서 농구를 가르쳐 달라고 제의가 들어오는데 혼자 힘으로는 감당이 안되서 아직 못가고 있어요. 가능하면 선생을 더 구하고 잘 가르치진 못하지만 도움이 된다면 어디든 가서 똑같이 수업을 해주고 싶어요. 한국 농구의 장점과 필리핀 농구의 장점을 복합시켜서 좀더 체계적으로 수업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농구를 하고픈 친구들에게.. 그리고 어느 누구나 농구를 좋아하는 교민사회를 만들어 가는 게 꿈이라면 꿈입니다”

 

3초 스피드 질문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마당에 기자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모 TV프로에서 진행하는 3초 스피드 질문. 그에게도 한번 질문을 던져보니 꽤 재미있어 했다.

 

이상면에게 농구란? 인생

이상면에게 아이들이란? 사랑

이상면에게 가정이란? 미안한

이상면에게 코치란? 행복

이상면에게 필리핀이란? 시골

 

장혜진 기자 wkdgpwls@manilaseoul.com

김정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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