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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자의 사람香]“발전한 한국 모습 보니 긍지와 보람 느껴”

한국전 참전용사 마우로 라치카씨

등록일 2010년06월04일 18시08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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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일자: 2010-06-04
 

필자는 매년 4월 중에 한번은 다른 날과 달리 꼭 새벽 일찍 일어나 타귁에 위치한 국립묘지로 향한다. 한국전쟁 당시 ‘자유수호’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준 필리핀 전우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기념행사가 이때 즈음 열리기 때문이다. 취재차 참석한 것이지만 장대한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헌화하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볼 때면 필자도 모르게 씁쓸한 기분과 함께 숙연해진다. 60년 전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그 낯선 나라에서 생사 갈림길에 섰던 것일까.

 

지난 5월28일(금) 케존 소재 캠프 아귀날도에서 만난 한국전 참전용사 마우로 라치카씨는 그동안 추모기념행사에서 보여줬던 우울한 모습과 달리 상당히 활기차 보였다. 81세의 노년에도 ‘KOREA VETERAN’이란 글씨가 박힌 운동모자를 쓰고 짚차를 모는 멋쟁이 할아버지였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친절하게도 자신의 집으로까지 초청한 마우로 라치카씨는 6.25참전 두번째 파병을 자원한 군인이다.

 

“한국전 두번째 파병 군사를 뽑는다고 할 때 무조건 지원했어. 한국이 어디에 있는 줄 몰랐지만 군인으로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지. 지원시험을 치렀는데 300명 지원자들 중에서 합격했다고 상관이 그러더군”

 

마우로 라치카씨가 두번째 파병 참전용사로 떠난 당시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는 어린 아내 프리미티바씨와 6개월 된 딸아이 하나를 둔 상태였다.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부인 프라미티바(78)씨는 “남편이 ‘한국’이란 나라를 가야 한다고 할 때 슬펐지만 겉으론 울지 않았어요. 울면 나쁜 운(Bad Luck)이 따라다닌다고 해서 마음으로 울어야 했죠”라고 말했다.

라치카씨가 한국에 도착한 날은 1954년 4월12일. 그로부터 5개월간 한국에 머물며 군인으로써 임무를 다했다. 그는 1차 파병때 만큼이나 위험한 순간은 없었지만 늘 긴장하고 살아야 했다고 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언제 또다시 전쟁이 터질지 모를 상황이기에 매 20분 간격으로 보고를 올려야 했어”

“그때도 한국은 여전히 황폐하고 참담했지. 나무 뿌리 하나 없는 황무지였거든. 탱크들만 줄창 돌아다녔어”

“가장 기억나는 건 우리모두가 친구였다는 것. 한국인이든 필리핀인이든 어른, 아이 너나 할 것 없이 ‘헤이 프랜드’하고 부르면 거의가 통했지”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와서 그가 처음 시작한 건 자신의 정원에 나무와 풀을 심는 일이었다. 5개월간 황무지 땅 한국에서 느끼지 못한 푸른 자연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아내와 같이 매일 정원을 가꾼다. 정성 들여 가꾼 라치카씨의 정원은 망고, 바나나, 산톨 등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면서 더욱 풍요로워졌다.

라치카씨는 군으로 복귀 뒤 20년간 이멜다 여사의 경호대장으로 소임을 다했으며 1986년 2월25일 은퇴했다. 그가 다시 한국땅을 밟게 된 건 17년 후인 2003년이다. 주필대한민국대사관의 협조로 방문한 라치카씨는 한국의 놀라운 발전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허허벌판이었던 한국이 발전해 지금은 경제 대국 12위에 올라섰다고 하니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었던 데에 긍지와 보람을 느껴”

“한국사람은 애국심이 매우 강하고 추진력이 빨라. 부지런하기까지 하지. 우리 필리핀사람들은 이런 한국인의 모습을 배워야 해. 필리피노는 마야방(타갈로그어 mayabang·’거드름 피다’는 뜻)하거든. 나는 내 자식들에게 한국인처럼 살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항상 말해”

“나는 내 손자,손녀들이 한국어를 배우길 바래. 한국국제학교에서 장학금을 지원해 손자가 무상으로 다닐 수 있게 됐을 때 많이 기뻤어. 거리가 멀어서 중간에 그만둘 수 밖에 없게 되었을 땐 무척 아쉬웠지만..”

“한국 소식에 늘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 최근에 천안함 사태로 한국젊은이들이 42명이나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다고 다시 전쟁 나리라곤 생각하지 않아. 남한은 북한의 놀림에 놀아나선 안돼”

 

라치카씨는 지난 4월1일 빅토리노 아자다 한국전참전용사회(PEFTOK) 회장이 세상을 뜨면서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한국전참전용사회 사무실로 출근해 업무를 보고 오후 3시면 퇴근한다.

요즘 그의 고민은 ‘참전용사들의 참여도를 어떻게 높이느냐’에 있다. 참전용사들의 건강문제도 있지만 올해와 같이 참전용사를 환영하는 행사초청이 많은데에 비해 교통비 조차 없어 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생존한 한국전참전용사는 모두 2710명으로 추산되는데 상당수가 생계에 어려움을 겪어 활동하는 이들은 약 3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5월에도 나를 포함해 4명밖에 참석하지 못했어. 다들 형편이 변변치 못하다 보니 그렇지. 한국전기념관도 세워지는 건 좋은데 거리가 멀다는 게 문제야. 거기 근처에 지프니도, 버스도 다니지 않아. 택시를 타던지 자가용을 이용해야 돼. 지난번에는 땡볕에 늙은이들끼리 20분 넘게 걸었어”

 

타귁 소재 한국참전기념관은 올해 한국전참전6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국가보은처에서 3억5000만원의 건립비를 들여 짓고 있다. 라치카씨도 금요일이 되면 현재 공사가 한창인 한국참전기념관을 보러 간다. 한국참전기념관은 참전용사 1세대를 위한 우리의 애정을 재확인시키는 동시에 2,3세 및 가족들과의 유대관계를 지속시키는 거점이 될 이 시점에 우리들이 조금이나마 라치카씨의 고민을 덜어드리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장혜진 기자 wkdgpwls@manila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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