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후원하기
뉴스등록
포토뉴스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네이버톡톡
맨위로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김선태 목사와 15문15답 인터뷰

등록일 2007년09월10일 16시35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기사글축소 기사글확대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뉴스일자: 2007-09-10
 

마닐라서울은 지난 8월28일(화) 마닐라시에 위치한 라몬 막사이사이 재단에서 올해의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한 김선태 목사를 만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과 인생관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질: 김목사님은 언제 어떻게 실명하게 되셨나요?

답: 저는 1941년 9월 경주 김씨 독자로 태어났어요.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났던 때에 저는 10살이었죠. 그때 즈음 저는 아침밥을 먹고 친구들과 들판에 놀러 갔어요.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지 모르겠으나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집은 폭탄에 의해 완전이 부서져버렸어요. 어린 저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죠. 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8월 즈음, 저는 동네 친구들과 강둑에 갔었어요. 거기서 멍하게 수박을 먹고 있는데 제 친구 한 명이 이상한 물건을 하나 가지고 왔죠. 공처럼 생긴 쇠 덩이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차에 갑자기 큰 폭발이 있었고 저는 잠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제 눈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을 인식했고 웃는 제 친구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수류탄 폭발로 저는 제 눈을 잃게 되었지요.

 

질: 태어날 때부터 잃었던 시력이 아닌 10살 때 시력을 잃고, 전쟁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혼자 남겨지고, 시력을 잃는 극도의 고통도 견뎌야 했을 터인데 그 후 어떻게 자라났으며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답: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설명하기 쉽지 않군요. 시력을 잃은 상태에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비극이었습니다. 저는 논에 고인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고 들판을 잠자리로 지냈습니다. 잡초, 나무 껍대기 등 살기 위해 먹어야 됐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고모가 경기도 양주지역에 결혼해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했죠. 문득 거기 가면 눈도 치료 받을 수 있고 학교도 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장님인 제가 거기까지 찾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양주로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찾아갔어요. 결국 고모집을 찾았고 그들의 환영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의 착각이었어요. 그들은 저를 불친절하고 냉정하게 대했지요. 지내는 동안 많은 욕설과 구타도 함께 포함됐어요. 1950년 12월 22일 저는 간신히 그 죽음의 벼랑에서 탈출 한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은 모든 사람들이 한국전쟁으로 피난 가기 위해 준비하느라 바빴죠. 그날 밤, 저는 고모와 고모부가 하는 말을 엿들었어요. “우리는 선태랑 같이 피난 갈수도 없고 여기서 더 이상 키울 수도 없으니까 차라리 밥에 독을 넣어 죽이는 게 낫지 않겠소. 그리고 내일 아침에 뒷산에 묻어버리고 이곳을 뜹시다”

저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살기 위해 고모집에서 야밤에 뛰쳐나왔어요.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그냥 피난민들의 뒤만 따랐지요.

 

질: 경제적 문제, 신체적 제약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정규 중, 고등학교를 다니는 게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 어려움을 이겨낸 힘의 근원은 어디서 나왔으며 최우수로 졸업을 할 수 있게 된 비결은 무엇입니까?

답: 저는 목표를 한국사회에 존경 받는 지도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그 꿈을 위해 공부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충분히 자본적이 없어요. 당시 저는 너무나 가난해 겨울밤을 얇은 여름옷으로 견뎌야 했고 제 기숙사엔 이불도 없었습니다. 많은 날을 외로움으로 지내왔지만 그 오랜 고통을 견뎌낸 지금의 저에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어 지금의 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죠.

 

질: 시각장애인으로 어떻게 3개의 의학학위를 가진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답: 모든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서 비롯됐습니다. 성경에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는 구절처럼.. 노숙자 생활을 2년 한 뒤에 ‘빛의 집’(부산에 있는 시각장애인복지센터)에서 점자 읽는 법과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함께 했던 학생들은 부산출신이거나 경상도에서 왔었고 주말엔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는 선생님들과 직원들을 위해 선물을 가져왔어요. 그러나 저는 갈 집이 없는 학생에 작은 선물 하나 살 돈 없었던 처지였는데 이러한 점들 때문에 기숙사 사감을 하던 한 선생이 저를 싫어했어요. 그 선생은 저에게 “선태는 희망이 없는 학생이다. 과연 선태가 마사지 직업을 가져 생계를 이끌어 나갈지 의문스럽다”라고 까지 말했어요. 저는 너무 화가 나서 방을 뛰쳐나와 하나님께 통곡했어요. “하나님, 저는 정말 희망이 없는 건가요?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라고 내내 기도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요. “비록 모든 이들이 너를 버린다 할지라도 선태야, 나는 너를 절대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저는 그 음성을 들은 후 희망과 용기가 넘쳐났고 어떠한 장해물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절망과 눈물의 기도는 저에게 3개의 의학학위를 가져다 주었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제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빛의 집’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일반 학교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은혜 덕에 학위를 마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질문: 김목사님만의 삶의 철학이 있다면?

답: 남은 여생을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며 사는 게 제 철학입니다. 특히 약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 같이 기도해주고 이야기 하는 벗이 되고 싶어요. 그들에게 살아갈 음식과 옷도 사주고 그들의 희망과 꿈을 찾아가는데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책들을 많이 읽고, 좋은 음악을 듣고, 피아노도 치고 싶고.. 마지막으로 제 지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질문: 앞으로의 미래 계획과 비전에 대해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답: 개인적으로 조금이라도 젊었다면 피아노를 치거나 첼로를 연주하는 것을 배웠을 텐데..라고 가끔 생각해요. 그러나 전 이제 60이 넘었고 제 꿈은 그대로 남아있지요. 제 일생에 마지막 꿈은 늙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행복이 넘치고 안락한 집을 짓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50세가 넘어도 그들의 손가락과 손을 이용한 신체 마사지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저는 항상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만약 누군가 땅을 기부해준다면 그 꿈을 실현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을 치료해 그들에게 빛과 새로운 삶을 선사하고 싶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제 일생을 통해 무엇을 했는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질문: 실로암 안과는 언제 설립했고, 어떻게 조직되어 있으며 다른 병원과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답: 실로암 병원은 1986년 2월17일 한국기독교강림 100주년을 맞아 설립됐어요. 현재 실로암 병원은 3곳으로 나눠져 있는데요. 첫번째는 서울에 위치한 ‘뿌리깊은 병원(Rooted Hospital)’, 두번째는 ‘움직이는 눈 안과병원(Moving Eye Hospital)’, 마지막으로 중국 연변에 위치한 ‘실로암 안과’가 있어요. 이 세 병원은 매년 800명에서 1000여명의 가난한 시력 장애인들을 위해 무료로 시력회복 수술을 해오고 있습니다.

 

질: 실로암 병원에 근무하는 의료진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해주신다면?

답: 실로암 병원에는 8명의 전문의를 비롯해 75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환자들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종교적 본분과 사회적 봉사 실현에 최선을 다하는 대표적인 안과병원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질: 실로암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책임자로써 가장 기억에 남거나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답: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은데요.. 무료시력회복수술을 받았던 모든 환자들을 다 잊을 수 없어요. 그 중 11명의 가족이 있었는데 모두 시력을 잃은 이들이었지요. 시골에서 살았는데 주위사람들은 저주 받은 가족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무시했는데 어느 장로님의 소개로 저희 병원에 왔어요. 진찰을 해보니 3명은 시력회복이 불가능 했지만 나머지 8명은 시력회복이 가능했지요. 저희는 이들을 수술했고 이들이 다시 자신이 사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주위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죠. 그리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어 보람을 느꼈습니다.

또 다른 것은 실로암 병원을 설립할 당시 저희는 자금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안 중앙교회 이순 목사님 덕에 우리 병원이 설립됐는데 매달 300불 정도의 교회 지원으로 운영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 후, 많은 후원자들이 생겨났는데 그 중 한 시력장애인 여성이 기부하러 병원을 찾았을 때를 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영양실조로 시력을 잃어버린 그 여성분은 아직도 그 절망감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며 그분이 모아둔 정부 보조금과 받았던 기부금을 저축해 저희 병원에 기부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때 그것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지만 그 여성분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지요.

 

질: 병원설립 이래 시력회복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수가 어떻게 되며 그 중 얼마가 시력 회복에 성공했습니까?

답: 35만여명의 환자들이 무료 진료혜택을 받았고 2만7천여명의 환자들이 시력회복에 성공했습니다. 실로암 모든 병원을 통해 사랑을 나누고 공유했던 수많은 환자들의 기록은 정말 가치 있는 것입니다.

 

질: 이러한 큰 규모의 봉사활동을 하면서 주로 경제적 지원은 어디서 받고 있나요?

답: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에 비롯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자원봉사자들로 인해 저희 병원은 기적적인 역사를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아직도 후원자들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들은 바자회, 차를 팔거나 후원금을 받는 등 여러 분야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자금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어요. 이들의 후원으로 2001년에는 시력장애인을 위한 큰 행사도 열었죠. 실로암 병원은 뚜렷한 수입의 예산 계획은 없지만 설립이래 자금적 문제로 목표를 멈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겸손히 기독교 형제, 자매들에게 우리 시력장애인들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는데 조그만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한 시력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하는데 드는 비용은 300불입니다.

 

질문: 35년간 한국에 살고 있는 많은 맹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살아오셨는데 짤막하게 맹인들을 격려했던 일들을 말해 주시겠어요?

답: 첫째, 15만여권의 점자로 된 성경과 찬송집을 맹인들에게 나눠 줬습니다.

둘째, 맹인 교회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맹인 목사들을 지원하고 후원하고 있습니다.

셋째, 저는 제 인생을 미래를 끌어 나갈 인재들에게 바쳤습니다. 1000여명이 넘는 맹인 대학생들과 맹인 신학도들을 후원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의사, 교수, 목사, 선생님이 되었고 저는 그들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넷째, 20년을 실로암 병원의 발전과 성장에 제 자신을 바쳐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서울장로교 동료들이 저를 서울장로회장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이때 하나님께 약속을 하나 했는데 세상을 살고 있는 시력 장애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전하며 지역사회의 가치 있는 지도자가 되어 그들의 눈에 빛을 되찾아 주는데 모든 힘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질: 필리핀에도 맹인들이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번 막사이사이 상 수상을 계기로 필리핀에도 봉사계획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답: 저희 맹인교회는 1989년 노화진 선교사 부부를 필리핀에 파송해 마닐라맹인교회가 이미 설립돼 있습니다. 저희는 이 교회에 3000불씩 돕고 있고요, 실로암 병원을 6배정도 확장시켜 실로암 아이센터를 건축하고 있는데.. 완공 후에 필리핀, 인도, 방글라데시, 미얀마를 돌아다니며 실명 예방과 시력회복 수술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말할 시기가 빠르지만 이곳에서도 아이 클리닉(Eye Clinic)을 설립해 현지 의사를 채용해서 운영하게 하고 저희는 1년에 한,두차례 필리핀을 방문해 필리핀 시각장애인들을 도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질: ‘필리핀’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필리핀은 가능성이 참 많은 나라입니다. 망고도 많고, 바나나도 많다면서요. 그러나 이런 좋은 자본을 가지고도 활용하는 아이디어가 적어 가난합니다. 아이디어를 잘 짜서 수출하고 수입을 올리면 필리핀이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필리핀에는 거지가 많습니다. 아마 이 거지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이것도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사업구상을 통해 거지들을 채용하고 일을 성실히 한다면 이 또한 마찬가지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나라가 가톨릭 국가인데다가 세속화 되어 있어요. 성적으로 타락하고 도덕적이지 못합니다. 앞으로 문화를 바꾸고, 정서를 바꾸고, 근면하고, 진실한 철학을 가지고 땀 흘리고 눈물을 하나님께 바치면 이 나라는 잘 살 수 있습니다.

 

질: 필리핀에 사는 교민들에게 해주실 말이 있다면?

답: 필리핀에 사는 교민분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오게 됐는지 잘 모르나 한국인끼리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고 도와주면서 살길 바랍니다. 물론 문화가 다르고 정서가 달라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점이 많겠지만 한 과정을 잘 뚫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고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도와주고 희생정신을 가지고 사시길 바랍니다.

김정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올려 0 내려 0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한인뉴스 필리핀뉴스 한국뉴스 세계뉴스 칼럼

포토뉴스 더보기

기부뉴스 더보기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현재접속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