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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 (9) 식민초기 최대 비밀결사 조선국민회 평양 중심 항일 독립 무장투쟁 추구…숭실학교 졸업생 장일환 의사 주도 김일성 부친 김형직도 참여…北 '반일민족해방운동 새 단계 연 역사적 사변' 평가

등록일 2019년03월23일 00시0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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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민회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이전 국 내 최대의 항일 비밀결사체다. 당시 독립운동의 주류가 계몽 운동이었다 면, 조선국민회는 무장투쟁을 통해 자력 독립 을 이뤄내야 한다는 강경 노선을 추구했다. 1917년 3월 23일 결성돼 일제 강점기 초 기 북한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1918년 지도부의 검거로 조직이 와해됐지만, 회원들은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이듬해 3·1 운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한국독립운동사 제2권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사', 독립운동사 제 9권 '학생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조선국민 회는 평양 숭실학교 출신이 주축이 돼 신학 교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학교 교사와 서당 교사, 교회의 신도들로 구성됐다. 당시 회원은 전국적으로 100여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 당시 권총과 장총 등 20여점을 샀고 총포를 소지하지 못한 회원들 도 전원 장도와 단도, 창 등으로 무장했다. 비밀결사인 만큼 그 운영을 철저히 기밀에 부쳤고 암호를 만들어 사용했다. 광역화하는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조직과 목적, 행동요령 등 정관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전달했다. 기관 지 국민보를 발간해 국내외에 비밀리에 배포 하기도 했다. 숭실학교 졸업생인 회장 장일환은 배민수, 백세민 등 숭실학교 출신 후배들과 함께 평양 학당골에 있는 리보식의 집에 모여 조선국민 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 립'이라는 혈서를 쓰는 등 죽음을 각오한 항 일투쟁을 맹세했다. 그러나 조직이 커지면서 일제 경찰에 발각 돼 1918년 2월 9일 장 회장을 비롯해 핵심 회 원 25명이 체포됐고 다른 회원들은 지방이나 만주로 피신했다. 이들은 훗날 대한국민회나 한국국민회 그 리고 만주지방에서 조직된 한국국민회 등에 서 독립운동을 벌였고 3·1운동에 참여했다. 장일환은 일제 경찰의 모진 고문 끝에 체포 된 지 두 달만인 1918년 4월 10일 32세의 젊 은 나이에 두개골과 대퇴부가 으스러진 채 평 양구치소에서 순국했다. 운송업, 광산업 등의 사업을 하는 부호 집 안 출신인 장일환은 20대부터 독립을 위해 교 육과 선교, 비밀 항일투쟁을 병행했고 독립운 동에 필요한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그는 1912년과 1914년 두 차례에 걸쳐 비밀 리에 하와이를 방문해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에 맞서 무장투쟁론을 주창했던 박용만 등 독 립운동가들과 회동한 뒤 귀국해 '조선독립청 년단'을 발족했으며 이를 모체로 조선국민회 로 발전시켰다. '조선독립청년단'은 평양근교와 묘향산 등 지에서 군사훈련을 했으며 평양주둔 일본군 헌병대장 관사 습격을 모의하기도 했다. 장일환은 1913년 안창호 선생 등의 후원으 로 평양에 청산학교를 설립했고 그해 말에는 미국인 길 목사와 함께 역시 평양에 연화동 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그의 독립운동 행적은 광복 45년 후 인 1990년에야 비로소 알려지게 됐고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중 세 번째 등급인 독립장을 추서했다. 광복과 함께 남북이 분단되는 바람에 평양 구치소에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일제 경 찰의 기록을 찾아볼 길이 없었고 유가족이 갖고 있던 자료들도 소실됐기 때문이다. 그의 장손인 세진(82)씨는 20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독립기념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 내 묻힐 뻔했던 그의 독립운동을 세상에 알 렸다. 조선국민회 활동이 한국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데는 자료의 부족도 있었지만, 한 반도의 분단과 냉전도 큰 몫을 차지했다. 조선국민회 회원 중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 의 아버지 김형직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조선국민회가 김형직의 주도하에 결성됐으며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발전 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은 역사적 사변"으로 평가한다. 조선국민회 창설 100주년인 2017 년에는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 회의 상임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보 고 대회를 성대히 열었고 주민들에게 조선국 민회 결성 장소인 '학당골' 참관을 장려했다. 북한이 김형직을 조선국민회의 핵심 조직 자로 선전하면서 북한과 연계된 독립운동가 들의 공적을 외면해왔던 한국에서는 조선국 민회에 대한 연구가 소홀할 수 밖에 없었고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장세진씨는 1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서 "조선국민회가 북한과 연관돼 있어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염려가 됐고, 남쪽에서도 연구 자가 별로 없는데다 생각도 다 달라 부담이 됐다"며 "갈등이 생기는걸 원치 않아 '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청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역사 연구가들은 김형직이 핵심 인사인 것 은 맞지만, 그가 조선국민회 결성을 주도했다 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30년간 김일성 주석의 항일빨치산 활 동을 연구하며 왜곡 과장 사실을 밝혀온 중 (9) 식민초기 최대 비밀결사 조선국민회 평양 중심 항일 독립 무장투쟁 추구…숭실학교 졸업생 장일환 의사 주도 김일성 부친 김형직도 참여…北 '반일민족해방운동 새 단계 연 역사적 사변' 평가 [3ㆍ1운동.임정 百주년] 국 옌볜(延邊) 조선족 출신 유순호(57) 작가 는 2017년 출간한 '김일성평전'(상권)에서 숭 실학교 졸업생인 장일환을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고 김형직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기술 했다. 장일환이 중심에 있었다는 얘기다. 일제의 평안남도 경무부장이 조선국민회 회원 25명을 체포한 후 작성한 조사자료에도 김형직은 장일환, 백세빈, 배민수에 이어 네 번째로 명단에 등장한다 유 작가는 장일환이 평양구치소에서 고문 으로 옥사하기 수일 전 바람을 쐬는 시간을 틈타 함께 투옥된 김형직에게 조선국민회를 부탁하며 독립 투쟁을 이어가 달라는 유명 (遺命)을 전했다고 김일성평전에서 밝혔다. 김형직은 장일환의 순국으로 사실상 와해 된 조선국민회를 복구하기 위해 가족 부양에 대한 의무를 버리고 만주로 건너가 '직업 혁 명가'로 나섰다고 유 작가는 덧붙였다.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인 회고록 '세기와 더 불어' 1권에서도 "아버지(김형직)는 장일환, 배민수, 백세민 등 애국적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리보식의 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했 다"고 기술했다. 조선국민회 핵심 4인을 언급 한 것이다. 김 주석은 아버지가 동창생인 백세민, 리보 식과 가깝게 지냈다며 이들을 '명망 높은 청 년선각자들'이었다고 적었다. 조선국민회의 초대 멤버이자 막내로 당시 연락책 역할을 했던 배민수는 광복 후 숭실대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양한준(편집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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