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후원하기
뉴스등록
포토뉴스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네이버톡톡
맨위로


 

[3ㆍ1운동.임정 百주년] (7) 북녘땅 만세운동 '성지' 평양·맹산 종교인 연대시위 서막 올린 평양, 사망자 656명으로 北 최다 제암리보다 먼저 발생한 '맹산 학살'…분견소 가두고 54명 사살

등록일 2019년03월09일 00시0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기사글축소 기사글확대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1919년 3월 1일 서울과 더불어 평양·진남 포·안주·선천·의주·원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 났다. 3·1운동 첫날 시위가 있었던 7곳 가운데 서 울을 제외하고 6곳이 모두 북녘땅이다. 3월 초순 북측 지역에 집중됐던 만세시위 는 같은 달 중순께부터 중남부 지역으로 확산 하면서 전국화했다. 그만큼 3·1운동 시위는 초기에 북측 지역이 남측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참여도가 높았고, 희생자도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한 북한 만세운동의 '성지'는 그간 남북 분단이라는 현 실 속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서울 다음 으로 큰 도시였던 평양의 시위가 서울 시위와 함께 전국적인 3·1운동을 촉발했다는데 이견 이 없다. 3월 1일 서울의 시위가 학생 주도로 이뤄 졌다면, 평양의 시위는 종교계가 주도했다. 당 일 오후 1시 평양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천도 교가 각각 고종 봉도식을 개최한 뒤 시내에서 연대시위를 펼쳤다. 세 방면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오후 3시 께 평양경찰서 앞에서 하나의 대오를 형성했 다. 이런 소식이 퍼지자 평양 인근 지역과 학 교에서도 시위대를 조직해 시내로 진출했다. 해 질 무렵에는 낮에 모인 숫자의 2배가 넘는 시위대가 평양경찰서 앞에 집결해 경찰과 대 치하면서 시위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일본 경찰은 시위대가 던진 돌에 경찰서 유 리 창문이 깨진 것을 빌미로 군부대와 합동으 로 시위 참가자 검거에 나섰다. 그런데도 9일까지 매일 평양에서는 상점과 학교가 문을 닫은 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의 논문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 연대의 힘'에 따르면 당시 평양 에서 8일까지 이어진 검거로 400여명이 체포 되고, 이 가운데 48명이 기소됐다. 김 교수는 "평양의 만세시위는 기독교와 천 도교의 연대로 성사됐다"며 "학생들은 학교 간 상호 연대가 아니라 교내 기독교 계파 간 연대를 통해 시위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첫날부터 평양에서 시작된 종교 연대시위와 종교와 학생 간 연대시위 방식은 이후 만세시위에 영향을 미쳐 곳곳에서 이런 양상의 연대시위가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백암 박은식 선생이 집필한 '한국독 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평양에서 3·1운동으 로 총 656명이 사망해 북측 지역에서 최다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양에 이어 함경남도 고원(489명), 평안 북도 삭주(300명), 평안남도 맹산(253명), 평 안북도 벽동(236명) 순으로 사망자 수가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사장은 "천 도교와 기독교 교세가 강했던 북한 지역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3·1운동이 확산했다"며 "여 기에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점을 고려하면 평양이 3·1운동 성지로 빠질 수 없다"는 견해 를 밝혔다. 일제의 3·1운동 탄압 사례 가운데 경기도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은 극악한 만행으로 꼽힌다. 제암리 학살은 1919년 4월 15일 3.1 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제암리 일대 양민들 을 교회에 모아 놓고 밖에서 문을 잠가 불을 지른 뒤 집단 총격을 가해 23명을 학살한 사 건이다. 이 때문에 남측 지역에서는 제암리를 3·1운동의 '성지'로 여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평남 맹산에서는 더 끔 찍한 일제의 학살이 자행됐다. 맹산에서는 3월 6일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첫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초기 시위는 비교적 평온하게 끝났다. 그러나 맹산헌병분견소장은 3월 10일 천도 교인 약 100명을 맹산공립보통학교 앞에 모이 도록 한 뒤 그 가운데 시위 주모자 4명을 체 포했다. 이에 천도교인을 포함한 200여명은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고, 분노한 시위대가 분견소 안으로 밀고 들어가자 헌병 과 경찰들이 이들을 가두고 발포했다. 이 자리에서 51명이 즉사했고, 3명이 부상 한 채 탈출했으나 결국 사망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제암리 학살보다 한 달여 먼저 발생한 맹산 학살은 3·1운동사 에서 단일 시간·장소 기준으로 가장 많은 사 망자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맹산 민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그 이튿날부터 매일 산발적인 시위를 이어갔다. 밤에는 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헌병과 경찰을 괴롭혔다. 맹산에서 3·1운동에 의한 사망자는 총 253 명, 부상자는 250명에 달했다

양한준(편집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올려 0 내려 0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한인뉴스 필리핀뉴스 한국뉴스 세계뉴스 칼럼

포토뉴스 더보기

기부뉴스 더보기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현재접속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