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강 선생은 평북 박천 출신이다. 1906년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의 문하생으 로 유인석이 군사를 규합하였을 때 이에 가담 하였으며, 유인석이 재차 요동(遼東)에 들어갈 때 그를 수행하여 노령(露領) 해삼위(海蔘威) 로 가서 활동하였다. 유인석이 1915년 동삼성(東三省) 지역에서 순국하자 그후 1921년 중국(中國) 상해(上海) 로 가서 중국인 부호 임척풍(林拓豊)의 후원 을 얻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일간신문 인 〈사민일보(四民日報)〉의 편집인으로서 독 립정신 고취 및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하는데 주력하였다. 1930년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귀국할 때 안중근(安重根)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처 단과 관련된 혐의로 신의주(新義州)에서 피체 되었으나 일본영사관에서 중국 내의 각 영사 관에 조회한 결과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 어 1930년 11월 27일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에 건국훈장 애국장(1987년 건국포장)을 추 서하였다. -emo["\udb82\udc54"]ji-신보-emo["\udb82\udc55"]ji- 1923년 3월 31일에는 다음과 같 은 기사가 실렸다. “한국인 박병강은 오른쪽의 손가락을 자르 며 ‘피로 求生을 대신해 求死를 하고 밥을 먹 듯이 칼을 맞겠다’ 등과 같은 글을 쓰고 밑에 唯血獨立軍이라고 서명하였다. 이 편지를 가 지고 중앙 黨部에 가서 일제 통치의 고통을 진술하며 北伐軍을 따라 전선에 가서 선전활 동을 하겠다는 요청을 했다” 손자 박제인 회장은 부모님께서 해방과 동 시에 평북 박천을 떠나 남쪽으로 이주하시어, 할아버지에 대한 유품이 많지는 않지만, 해방 을 6개월 앞두고 1945년 2월에 세상을 떠나 셨다는 이야기를 부모님을 통해 전해 들었다 면서, 할아버지가 대한민국의 광복을 6개월 앞두고 돌아가신것에 대해서는 너무 안타깝 다고 말했다. 박제인 회장은 할아버지가 태어나신 지 올 해로 140년을 맞아 중국 박물관에 있는 할아 버지의 휘호도 보고,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발굴해 주신 중국 복건성을 방문해 관계자들 을 찾아 뵐 계획을 설명하면서 3.1운동 100주 년을 맞아 앞으로 100년에 더 위대한 미래를 염원하며 “대한사람 대한으로, 대한독립만세, 대한민국 만만세…”라고 크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