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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 (5) 만세시위 확산 불 댕긴 북녘땅 3월 1∼14일 만세시위 71%가 한반도 북부서 발생…기독교 인사 주도 초반부터 폭력적 양상 드러내기도…"일제에 대한 지방의 전면적 저항"

등록일 2019년02월16일 00시0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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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립선언을 하려면 이러이러한 물건 이 필요하다고 신도를 모아 놓고 이야기하였 더니 그자들이 협의를 하고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므로 내가 지휘한 것과 같은 셈이다."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목사 유여대는 1919년 3월 7일 평 양지법 신의주지청에서 열린 검사 신문에서 자신이 의주 독립선언식을 이끌었음을 시인 했다. 유여대는 검사가 "조선이 독립해도 혼 란에 빠지고 실력이 없어 오래 지탱하지 못한 다"고 말하자 "국민 전부가 독립정신이 충만 해 있으므로 완전히 독립이 이뤄진다. 실력은 이제부터 양성하면 된다"고 답했다. 평북 의주는 서울,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원산과 함께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하 는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서울을 제외하 면 모두 한반도 북부지방이다. 3·1운동은 초반에 서울과 경의선으로 연결 된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펼쳐졌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 원을 지낸 이정은 박사가 쓴 '3·1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14일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276건 중 71.4%인 197건이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발생했다. 3·1운동 첫날부터 만세시위를 벌인 도시는 철도역이 있고, 상공업이 발달했거나 큰 시장 이 선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북부지방이 3·1 운동 초반부터 동참한 데에는 민족대표 기독 교 인사 중 상당수가 이곳 출신이라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길선주는 고향이 평남 안주이고, 김창준은 평남 강서 출신이며, 오 산학교를 설립한 이승훈은 평북 정주에서 태 어났다. 기독교인이 저항 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 은 3월 1일 서울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사람 이 군집한 평양에서의 준비 과정을 보면 확연 히 알 수 있다. 지난해 12월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 엄에서 북한 지역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 대 해 발표한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평양 3·1운동은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당이 국내에 파송한 선우혁이 1919년 2월 9일 이 승훈 장로의 소개장을 가지고 장대현교회 목 사 길선주를 찾아가면서 태동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판결문에 따르면 이승훈은 2월 12일 송진우를 만나 천도교와 합작할 것에 합의했고,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활동한 감리 교 목사 신홍식은 2월 19일 서울에서 이승훈· 박희도·이갑성 등이 참가한 모임에 갔다가 돌 아온 뒤 만세운동에 대비했다. 평양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개신교 장 로교계와 감리교계, 천도교계가 각각 숭덕학 교 운동장, 남산현교회, 설암리 교구당에서 따 로 진행했다. 이들은 광무황제(고종) 봉도식 을 개최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시내에 서 합류해 행진했다. 김 소장은 "일제 헌병 경 찰은 3월 2일부터 주동자 체포에 들어가 8일 까지 400명 이상을 검거했다"며 "그중 주동자 로 생각한 48명은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했다"고 말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논문 '1919년 3월 1 일 만세시위, 연대의 힘'에서 "첫날부터 평양에 서 시작된 종교 연대시위와 종교와 학생 간의 [3ㆍ1운동.임정 百주년] 연대시위 방식은 이후 만세시위에 영향을 미쳤 다"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북부지방이 초반부 터 3·1운동에 참여한 데 대해 "사전에 주동자 들의 조직과 준비가 있었다"며 "민족대표의 영 향력과 역할도 다른 지역보다 컸던 것으로 보 인다"고 지적했다. 성주현 숭실대 교수는 평남 강서·맹산, 황해도 수안에서 벌어진 3·1운동을 분석해 "공세적 만세시위는 3월 초에 집중됐으 며, 식민지배의 첨병 역할을 한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고 헌병을 살해했다"면서 초기부터 시 위가 폭력적인 면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독립기념관이 펴낸 '한국독립운동사사전' 이 기술한 지역별 3·1운동 특징을 보면 평안 도는 한꺼번에 들고 일어났다가 일단 쇠퇴하 는 듯했으나 다시 터져 나오는 간헐적 양상을 띠었으며, 함경도는 기간이 중남부 지방처럼 길지는 않았어도 한 번 일어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강인성을 보였다. 황해도는 장기간 면 면히 이어지는 끈질김이 특징이었다. 지방의 3·1운동에 대해 연구해온 이정은 박사는 책 '한국민족운동사연구'에서 3·1운동 을 전기(3월 1∼11일), 중기(3월 11∼25일), 후 기(3월 26일∼4월 10일)로 나눈 뒤 황해도·평 북·평남은 초기에 시위기 집중됐고, 함남은 중기에 민중의 힘이 폭발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제는 조선시대에 시행된 간접적 규 제 방식의 지방통치를 직접적 규제로 전환해 향촌의 자율성을 해체했다"며 "3·1운동은 일 원적·수직적 지배를 관철하려는 일제에 대해 지방사회가 전면적으로 저항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양한준(편집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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