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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 (4)北에선 봉기…부르주아 민족운동 규정 중요성 인식하면서도 '실패' 평가…노동자·농민 중시하고 민족대표 비판 주체사관 강화하면서 러시아 혁명 비중 줄이고 김일성 가계 강조

등록일 2019년02월09일 00시0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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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 인 3·1운동은 북한에서도 그 중요성을 인식해 비중 있게 다뤄져 왔다. 북한에서는 3·1운동을 3·1봉기 혹은 3·1인 민봉기라고 부른다. 인민봉기라는 용어에는 아래로부터의 집단적 움직임과 민중의 역할 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3·1운동의 원인과 성격, 결과에 대한 북한 역사서의 서술은 지속해서 달라졌다. 학계에 따르면 북한 정권 수립 직후인 1949년에 나온 '조선민족해방투쟁사'(김승화· 최창익 등 집필)는 3·1운동을 각계각층이 연 합되어 남녀노소 참가한 민중봉기로 정의하 면서 운동 주체를 농민, 노동자, 학생 순으로 설명했다. 반면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 서를 발표한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선 완전히 인민을 배반했고, 소(小)부르주아 지식층의 계급적 제한성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민족대표가 3·1운동에 기여했다고 보는 남 한 학계와 달리 북한에서는 지금도 민족대표 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항 쟁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조선민족해방투쟁사'는 3·1운 동이 실패한 원인으로 민족지도층이 자산계 급으로서 외교적 청원으로 독립을 이루려 했 고, 군중 무장이 없었다는 점을 지목했다. 아울러 북한은 원시공동체,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 순으로 역사가 발전한다 는 마르크스주의 사관과 계급성을 바탕으로 사실(史實) 해석을 시도해 3·1운동이 결과적 으로 실패했다고 단정하고, 성격은 부르주아 민족운동이었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3·1운동을 부르주아 민족운동과 본격적으 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1960년 전후에 이뤄 졌다. 지난해 논문 '북한 역사학의 3·1운동 인식' 을 발표한 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는 "1961년에 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를 보면 부르주아 민족운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 가 두드러진다"며 "북한에서는 1884년 갑신 정변에서 시작된 부르주아 민족운동이 3·1운 동을 계기로 '쇠퇴몰락'하고 민족해방투쟁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인식이 자리 잡 았다"고 밝혔다. 이어 "1920년대 노동자 계급의 성장을 기 다려 비로소 반제·반봉건 투쟁이 궤도에 오 른다는 도식이 성립됐다"며 "이러한 시각으로 인해 북한에서는 1920년대 초반을 근대의 종 점이자 현대의 기점으로 보는 새로운 시기 구 분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3·1운동 인식에서 1960년대 이후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은 주체성 강화다. 1980 년 무렵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 체할 지도사상으로 승격하면서 민족적 주체 성을 강조하는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이러한 변화는 3·1운동이 발생한 원인에 대 한 태도에서 확인된다. 1949년 책인 '조선민 족해방투쟁사'는 망국의 설움, 쓰라린 일본통 [3ㆍ1운동.임정 百주년] 치와 함께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10월 혁 명의 승리를 3·1운동 원인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주 축이 돼 1982년 간행한 '조선전사'에는 3·1운 동 항목에 러시아 혁명의 영향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이전까지 북한이 사회주의와 연계 해 주목한 1919년 3월 5일 서울 시위에서의 적기(赤旗) 등장에 관한 내용도 사라졌다. 1980년대부터는 김일성 가계의 활약에 관 한 서술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조선전사'는 반일민족해방운동에서 김일성 부친인 김형직 이 민족주의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전환 했다고 평가하면서 평양을 3·1운동이 가장 먼 저 일어난 장소로 규정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는 오후 2시 무렵 서울과 평양을 포 함해 7개 도시에서 열렸고, 규모는 서울이 가 장 컸다. 홍 교수는 "북한은 이전에도 3·1운동에서 평양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통사(通史) 서적 중 서울을 젖히고 평양을 앞세운 사례는 조선 전사가 처음"이라며 "2011년에 나온 '조선통 사'에서는 서울을 경성으로 표기해 서울이 지 닌 상징성을 더 낮췄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서술은 운동의 주도권 혹은 중심성 문제를 넘어 역사의 무대에 대한 지리 적 상상력의 단절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 다"고 지적했다.

양한준(편집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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