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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년 우정의 원조>필리핀 참전용사 인터뷰

등록일 2013년07월27일 00시0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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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반드시 없어져야 합니다. 인간이 만 든 가장 큰 재앙입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 라면 총알 하나를 100만 달러로 바꾸자는 협 상에도 응해야 합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시내 포트 보니파시 오에 있는 한국전 참전기념관에서 지난 15 일 만난 참전용사 메이저 영(91) 씨는 구순 을 넘긴 나이에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63년 전 끔찍했던 한국전쟁을 떠올리며 "전쟁은 노 (NO)"라고 여러 번 소리쳤다. 그는 19살 때 제2차 세계대전에 나가 일본 군과 싸운 것을 시작으로 필리핀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4차례나 참전 해 생사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전쟁이라면 지 금도 치가 떨린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서도 살아 있는 동안 후손에게 참혹 한 전쟁사를 남겨야 한다며 29살 때인 1950 년 9월 부산항 도착 순간부터 1년 동안 한국 전에 참전한 기억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그는 필리핀 정부가 한국전 파병을 결정한 이후 가장 먼저 참전한 1천400명 가운데 한 명의 용사였다. 필리핀 내 공산세력과 전투한 경험이 있어 선발대로 뽑혔고 리콘 중대(10 BCT) 소속 하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필리핀 은 1955년까지 총 5회에 걸쳐 7천420명의 용 사를 파병했다. "배로 부산항에 도착했어요. 피난민이 엄청나게 많았죠. 그들은 배가 고 파 보였고, 굉장히 말랐어요. 그 가운데 아이 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헤매는 모습을 보면 서 가슴이 아팠어요. '이들이 전후 복구를 해 야 하는 세대구나' 하는 생각을 하자 슬프기 까지 하더라고요. 우리는 부산에서 곧바로 경 남 밀양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한국 적응 훈 련을 했답니다. 1주일 동안 지냈는데 뱀 8마 리가 침낭 속으로 들어와 죽을 뻔했죠.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섬뜩하답니다." 그는 밀양에서 경북 왜관으로 진지를 옮겨 첫 임무를 받았다. 후방의 공산 게릴라를 색 출하고 북으로 올라가는 보급선을 보호하라 는 명령이었다. 6개월 동안 전개한 게릴라 소 탕작전에서는 처음으로 전우 1명을 잃는 아픔 도 겪었다. 미군과 함께 낙동강을 지키며 최후 방어를 하던 그는 북한군이 패퇴하자 왜관-금천-안 주-북한 평양까지 진격했다. "평양까지 올라가면서 묘동(Miudong) 전투 가 있었어요. 북한군 2개 연대와 싸웠죠. 한 번은 북한군의 기습이 있었습니다. 높은 지 역에서 아래의 우리 진지로 사격을 가해왔죠. 반격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제가 탱크에 달 린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공세를 취할 수 있었 답니다. 저는 이 전투의 영웅이 됐지만 또 전 우를 잃었죠." 연합군의 진격은 중공군의 가세로 주춤했 고, 그는 잠시 평양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남 하했다. 때는 12월. 영 씨는 지금도 당시의 추 위가 느껴지는지 'Very(아주)'를 여러 번 외치 며 회상했다. "타고 가던 차량은 얼어서 움직이지 못했 고, 필리핀 병사들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동상에 걸려 짓무르고 피가 뚝뚝 떨어졌어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죠. 북한군이나 중공 군보다 더 큰 적이 추위였어요. 오줌을 누면 곧바로 얼어버릴 정도로 추웠어요." 평양에서 서울을 거쳐 수원까지 후퇴한 필 리핀군은 1월에 미군이 다시 반격하면서 같 이 북진했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군대가 전 공을 올린 비무장지대(DMZ) 14마일 위쪽에 있는 경기도 연천군의 율동(栗洞) 전투(1951 년 4월 21∼22일)가 있었다. 필리핀 대대 병력 이 중공군 사단 병력을 물리친 곳으로, 이를 기념하는 참전비를 연천군 상리에 세웠다. "이틀 동안 중공군 4만4천여 명과 북한군이 전선을 구축하고 연합군과 맞섰지요. 우리는 율동 지역을 방어했는데, 4월 21일부터 이틀 동안 적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었어요. 연합 군 대부분은 전멸하거나 후퇴했는데 우리는 성공적으로 방어했어요. 하지만 이 전투에서 5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옆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봤 어요.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었어요." 그는 이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50년 뒤 골 드크로스메달(훈장)을 받았다며 왼쪽 가슴에 단 훈장을 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지내다가 1951년 9 월 부산항을 떠나 10월에 귀국한 그는 "전쟁 중에 만난 아이들의 착하고 순수한 눈망울이 가슴에 남아 있다"며 "그들이 오늘날 한국의 발전을 이룬 주인공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고 감격해했다. 귀국해 대위로 승진한 그는 ROTC 교관으 로 일하다 전역했다. 민간인 신분으로 미국 CIA에서 봉급을 받으며 2년간 베트남전에 군 사자문관으로 참전했다. 이어 가스회사에 들 어가 20년간 일하다 1992년 은퇴했다. 현재 한국전 참전용사회(회장 파테르노 빌 로리아) 5개 분과 가운데 1개 분과 회장을 맡 은 그는 "필리핀에는 한국전 참전용사 2천여 명이 생존해 있다"며 "이들은 민주주의를 지 키기 위해 싸운 산 증인"이라고 소개했다. "전쟁은 생각하고 느낄 시간조차 없어요. 어 떡하면 살 수 있을까만 생각하죠. 옆에서 전 우가 머리에 총을 맞아 죽는데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전쟁은 생존의 문제예요. 절대 일어 나선 안 됩니다." 영 씨는 한국이 KOICA를 통해 필리핀 참 전에 대한 보은 사업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열거하면서 기사에 꼭 반영을 해달라며 여러 차례 "생큐(Thank You)"를 연발했다. 그러면서 30년 뒤에는 한국과 필리핀이 어 깨를 나란히 하며 발전하고 남한과 북한이 빨 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오는 23일부터 가톨릭대 초청으로 방한해 대 학생에게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예정이라는 그 는 정부가 시행하는 참전용사 재방문 사업에 의 해 1997년부터 5차례 한국을 찾아 발전상을 눈 으로 확인했다. "1997년 47년 만에 한국을 다 시 찾았을 때 '기적'이라는 용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어요. 짧은 시간에 한국이 세계 경제대 국으로 성장한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죠. 1개 밖에 없던 한강다리는 수십 개로 늘어났고, 높 은 빌딩과 도심의 마천루, 지하철, 정리 잘된 공 원. 눈을 뜨고 있어도 믿을 수 없었답니다. 필리 핀도 한국처럼 기적을 이루기를 바랄 뿐입니다."

양한준 기자1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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