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7일 사진작가 윌리엄 로버츠 촬영한 하수구에서 기어나오는 여성의 모습 [GMA]
지난 5월 27일 마카티 한복판, 배수구에서 여성이 기어 나오는 장면이 찍힌 사진 한 장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처음엔 기묘한 바이럴 마케팅이거나 조작된 영상이라 여겼지만, 실상은 충격적이었다. ‘로즈’라는 이름의 여성은 하수구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극심한 주거 빈곤의 실상이었다.
사회복지부(DSWD)는 즉각 개입해 로즈에게 생활 지원과 함께 작은 사리사리 스토어를 차릴 수 있도록 돕는 ‘팍-아봇(Pag-Abot)’ 프로그램을 적용했다. 이 지원금이 8만 페소에 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온라인에서는 "하수구에 살면 돈 준다"는 조롱 섞인 농담이 퍼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필리핀 도시 빈민의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드러낸 비극이다.
DSWD는 지원이 철저한 사례 조사와 모니터링을 거친다고 강조했다. 지원금은 일괄 지급이 아닌 단계별로 나뉘어 지급되며, 오용을 방지하기 위한 감시 체계도 갖춰져 있다고 설명했다. 렉스 가찰리안 장관은 “누구나 하수구에 들어가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은 오해”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도시 빈민운동 단체 ‘카다마이(Kadamay)’는 이 같은 방식이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다고 비판했다. 단체의 미미 도링고 사무총장은 "하수구에서 자는 이들을 위한 응급 지원금은 임시방편일 뿐"이라며, "농담, 동정, 일회성 지원이 아닌 구조적인 주거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도시 빈민 대부분은 철거 위협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가 제공하는 이주지는 대부분 도시 외곽이며, 상수도, 전기, 교통, 교육 등 기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생계를 위해 다시 원래 거주지 근처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정부는 이를 해결하고자 2023년 ‘모든 필리핀인을 위한 국가 주택 프로그램(4PH)’을 출범시켰다. 국토주거부(DHSUD)는 도심 내 사회주택 공급, 임대료 지원, 인-시티 재정착 방안을 약속했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필리핀개발연구원(PIDS)은 2024년 보고서에서 “사회주택조차 저소득층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토지 가격은 급등하고 있지만 임금은 정체돼 있어, 실제 분양금 상환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민간 건설사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보다는, 공공 주도의 직접 건설 및 생계형 보조금 도입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권고했다. 이와 함께, 몇몇 도시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커뮤니티 기반 주거 프로젝트’가 효과를 내고 있다며 정부가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도링고는 “빈곤층은 단지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철거 시 대체 이주지 없는 강제 이주 중단, 최소한의 생활 임금 보장, 비정규 시장 상인의 생존권 보장”을 포함한 전면적 도시 빈민 대책을 촉구했다.
2023년 9월 발표된 졸리 홈즈 재단의 노숙자에 관한 정책연구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필리핀의 노숙인은 약 45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 중 약 3분의 2가 수도 마닐라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세계 도시 중 가장 많은 노숙인 인구로 알려져 있다. 경제 중심지인 마닐라의 이러한 현실은 도시 내 극빈층의 집중을 여실히 보여준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켰다. 장기간의 봉쇄 조치는 대규모 실업과 빈곤 증가를 불러왔으며, 이는 결국 노숙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다.
특히 약 25만 명의 노숙 아동이 거리나 공공장소, 혹은 빈민가 내 판잣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실제 수는 백만 명에 달할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2018년 (Association Soeur Emmanuelle Philippines, Inc, ASMAE)필리핀의 조사에 따르면, 거리 아동 다수는 구걸, 행상, 지프니 안내 등 생계를 위한 활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교통사고, 마약 및 알코올 노출, 괴롭힘 등 다양한 신체적·심리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의 노숙 상태는 대부분 가정의 해체, 부모의 사망, 수감, 방치와 같은 가족 구조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정부 서비스의 효과적 제공이며, 이는 명확한 ‘노숙인’ 정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현행 법과 정책은 노숙인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택 관련 주요 법인 ‘1992년 도시개발 및 주택법’(RA 7279), ‘주택도시개발부법’(RA 11201)에는 ‘노숙인’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가 없다.
공공기관들도 각기 다른 분류를 사용하고 있다. 인권위원회는 ‘거리 노숙인’이라는 표현을, 사회복지부는 거리 기반 가족, 거리의 가족, 거리 노숙 가족 등 다양한 하위 분류를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들이 통일되지 않고 기관별로 상이하게 적용됨으로써, 실질적인 정책 적용에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일부 노숙인은 제도권의 지원 대상에서 배제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닐라 북부 묘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수변 지역에 거주하는 비공식 정착민(ISF)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공주택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는 정부 프로그램 설계에서 거리 거주민을 ‘집 없는 자’로 분류하여, 정착민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의의 부재는 정책적 배제를 초래하며, 노숙인을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든다. 현재까지의 정책들은 주로 ‘사회적 안전장치’ 제공에 집중되어 있으며, 노숙인을 개발사업에서의 폭력적 퇴거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려는 목적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2012년 부랑자 처벌법의 폐지다. 과거에는 거리 배회, 빈곤, 일하지 않는 성인 등이 처벌 대상이었지만, 해당 조항이 삭제되며 일부 인권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구걸은 ‘구걸방지법’(1978) 하에서 불법으로 간주되며, 구걸 아동을 이용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지방정부와 내무부가 함께 재활 서비스와 수용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퇴거와 철거 시 경찰 개입 절차를 명시한 내무부 지침(MC)은 노숙인의 폭력적 배제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필리핀의 노숙인 문제는 단순히 ‘거리에 사는 사람’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정책적 정의의 부재와 그로 인한 구조적 배제, 그리고 도시 내 빈곤의 가시화를 둘러싼 인권 문제다. 지속적인 주거 불안과 빈곤 속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정책의 사각지대에 머물고 있다. 노숙인의 정의를 통일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체계적인 정책 설계와 프로그램 시행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는 단순한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 내 인간 존엄의 문제다.
마닐라서울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