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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도리의 대중음악 후비기]마이클 잭슨 (1958 – 2009) (마지막편)

등록일 2009년09월18일 18시08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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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일자: 2009-09-18
 

[Dangerous] 앨범의 판매량은 마이클 잭슨이 음악에 대한 투자한 만큼 성공가도를 달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꾸준한 공연투어와 93년 수퍼볼 하프타임 공연, 오프라 윈프리에 전격 출연해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더불어 앨범의 판매량도 급증했다. 90년대 들어 ‘마이클 잭슨의 시대가 갔다’며 떠들어 대던 언론들에게 기분좋게 한방 날린 셈이다. 그러나 언론들은 (마이클 잭슨이 극히 혐오하는 싸구려 ‘타블로이드’) 마이클 잭슨을 걸고 넘어질 또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었는데 바로 아이들에게 끊임없는 선행과 관용을 배풀며 어린이들을 사랑한 마이클잭슨 그 자신이 아동학대(성추행) 혐의로 경찰로 터 고발 당하게 된 사건.

고발인은 LA 경찰이었고 13세 소년을 강제 성추행 했다는 혐의로 고발을 했지만 처음 이런 의심을 제시한 것들은 각종 파파라치들과 언론들이었다. 물론 이 사건이 진행되자마자 언론들은 흥분했다. 계획중이던 모든 마이클 잭슨의 투어는 취소됐고 마이클은 이를 위해 싸워야 했다. 그해 12월 마이클은 TV에 출연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당시 LA경찰에 굴욕적인 체포를 도리어 고발했다. 증인들의 증언 거부 및 증거 불충분 등으로 마이클 잭슨이 법원에까지 출두하는 사태없이 사건은 법원밖에서 해결되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끊임없는 선행을 해온 마이클에게는 이 사건은 지울수 없는 상처가 되었고 이후 제기를 노리며 신곡과 함께 히트곡 모음집인 [history]를 발표한다. 앨범에 담긴 14개의 신곡은 이전과는 다르게 공격적인 리듬과 사회적인 불평등함 (마치 본인이 겪었던 LA경찰에 의한 체포 사건을 떠올리듯)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다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지만 세상은 그를 더이상 예전의 순수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한편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97년 런던에서 열린 Brit Award에 참석해 ‘Earth song’이라는 곡을 무대에서 부르고 있을즈음 당시 영국의 인기밴드이자 무대밖에서는 독설가로 알려진 밴드 ‘Pulp’의 ‘자비스 코커’라는 인물이 무대위 마이클잭슨에게 몰라 다가가 ‘똥침’을 놓는 굴욕적인 돌발행동을 하였는데 마이클 잭슨은 이에 격분했고 언론은 처음 이 사건을 통해 마이클 잭슨을 옹호하게 된다.

이렇게 90년대는 초반부터 마이클잭슨에게는 지옥과 같은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에게도 좋은 시절은 있었다. 94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한 것이다. 2년만인 96년에 이혼했지만 결혼 당시에도 조금 급하게 하는 경향도 있었고 이때도 언론은 성추행사고로 이미지가 추락한 마이클잭슨이 대중 호도용으로 급하게 한 ‘가짜결혼’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혼하고 나서 혼자가 된 마이클 잭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아빠가 된다’라는 발표를 한다. 아이엄마는 마이클잭슨의 백반증(피부가 탈색되는)치료를 위해 고용한 간호사라고 했다.아이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이들은 이혼했다. 마이클 잭슨은 이후 2명의 아이가 더 생겼는데 예전 기억에 따르면 본인 정자를 이용해 인공수정한 대리모의 아이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법적으로 마이클 잭슨의 아이들이며 계속 같이 살았다. 그러나 생김새는 어딘가 모르게 이지적인 느낌이 없지않아 있기도 하다. 왜냐하믄 그들의 아이들 3명 모두 흑인의 피는 섞여 있지 않은 백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2001년 ‘Invincible’이란 타이들로 새앨범을 발표했지만 계약사인 sony 레코드의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제대로 된 활동 한번하지 못하고 접게된다. 이를 계기로 마이클잭슨은 당시 천문학적인 액수로 계약을 했던 Sony와 결별을 선언했다. 2009년 3월 화려한 컴백을 알리는 기자회견과 함께 이의 신호탄이 될 런던에서의 첫 투어 콘서트를 연습하던 도중 6월25일 심장마비 증세로 호흡곤란과 함께 실신, 응급차로 후송되었으나 결국 숨을 거두었다.마이클잭슨의 담당 주치의는 평소에도 처방하던 심신 안정제와 몇가지 추가 약물을 처방했다고하나 현제까지 경찰 발표는 본 담당의사의 오처방으로 인한 약물 과용으로 사망처리 했다.

누가 뭐라 해도 마이클 잭슨은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뮤지션이자 엔터테이더였다. 또한 의심할 것 없는 천재다.

5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어릴적 그의 행적부터 자세히 다뤄 보았지만 그는 그의 개인사가 전혀 없다. 수퍼스타가 되었지만 그는 너무 커졌고 마치 영화 ‘트루먼 쑈’의 주인공처럼 일거수 일투족이 언론과 대중에 공개되어 피곤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수퍼스타로서 그가 책임지고 살아가야 하는 평생의 짐이였어야 했나 보다.

이제는 가고 없지만 그의 수많은 히트곡과 특히 나에게는 음악의 세계로 인정해준 어쩌면 최초의 인물일수도 있는 마이클 잭슨을 위해서 오늘은 오랜만에 Thriller 씨디를 틀고 운전석에 앉아야겠다.

김정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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