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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도리의 대중음악 후비기]마이클 잭슨 (1958 – 2009) 2

등록일 2009년08월06일 17시3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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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일자: 2009-08-06
 

69년 부터 시작된 ‘잭슨5’의 커리어는 70년대 중반까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여러 히트곡을 남기며 승승장구하기만 했다. 미전역을 돌며 투어를 해야 했던 탓에 마이클 잭슨과 형제들은 유년시절이 없다고 할 만큼 끔찍한 양의 일거리들을 소화해야했고 심지어 집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그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 한창 인기 있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영화를 보면서 간절한 마음을 삭여야 했다.

워낙에 어린 시절부터 무대 위에서의 생활과 타이트한 스케줄, 인정사정 없는 매니저이자 아버지 ‘조 잭슨’의 횡포로 인해 성인이 된 마이클 잭슨이 왜 그렇게 유년시절의 추억과 아이들에 대한 집착적인(?) 사랑, 또한 그 자신이 ‘살아있는 피터팬’이라 자칭하고 자신의 저택을 동화 피터팬에 나오는 ‘네버랜드’라 지으며 커다란 놀이동산으로 꾸미면서까지 (정신적인) 성인이 되기를 거부하였는지 나타내는 대목이다.

유년기 - Jacksons

70년대 중반까지 모타운 레코드 소속이었던 이들은 아버지 조 잭슨의 결정으로 더 많은 계약금을 제시하는 에픽 레코드로 옮기게 된다. 그러나 모타운 레코드는 그의 독단적인 소속사 변경이 괘씸하다 생각을 했는지 더이상 Jackson5라는 밴드명을 쓰지 못하게 소송을 걸었다. 결국 그들은 새로운 이름인 Jacksons로 밴드명을 바꿔야 했다.

밴드명은 바뀌었으나 그들의 음악이 바뀐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바뀐 ‘잭슨스’에 대해 크게 실망하지 않았으며 소속사를 옮기면서부터 직접 작곡과 음반작업에 착수하면서 음악적으로  더욱 성숙해 갔다.

하지만 이들의 최고 전성기인 잭슨5 시절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마이클 잭슨에게도 변성기가 찾아왔고 당시 유행인 그들의 아프로 파마 머리는 풍성하게 자라났으나 히트곡수는 줄어버린 것이다.

78년경 마이클 잭슨은 당대 유명한 가수들이 나와서 공연하는 흑인판 ‘오즈의 마법사’인 ‘the wiz’에서 허수아비역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이때 만난 ‘다이아나 로즈’가 소개시켜준 인연으로 흑인음악계의 거장 프로듀서 ‘퀸시존스’를 만나게 된다.

이 시기에 마이클 잭슨은 최초의 성형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공연도중 무대에서 떨어져 코가 크게 부러진 사건을 계기로 부상+미용의 차원으로 성형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부상의 원인이 크긴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마이클은 노래도 잘하고 율동도 잘하는 천재 엔터테이너로서 인기를 얻은 반면 유달리 큰 코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고 아버지 ‘조 잭슨’은 당시 매니저이자 혹동한 트레이너로서 술에 취해 들어온 날이면 유년기 마이클 잭슨에게 여드름 투성이에 코마저 펑퍼짐한 자신을 조롱하며 비웃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이클 잭슨은 그 모습을 지우기 위해 여러 차례 성형수술을 통해 사망 전까지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퀸시존스가 참여해 제작된 첫번째 솔로음반인 [off the wall]은 당시 유행하던 그저그런 디스코풍의 음반이 아닌 정교한 펑키리듬과 마이클의 음색을 가장 잘살린 작곡의 힘으로 잭슨의 천부적인 재능과 퀸시존스의 노련함으로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신인이였던 마이클 잭슨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었고 첫 그래미상 수상까지 하게 된다.

이 앨범은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 되게 된다.

김정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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