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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할끼타 필리피나스] 준비된 만남

등록일 2009년07월06일 15시54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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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일자: 2009-07-06
 

김영주(33기)

활동분야: 컴퓨터 그래픽

활동기관: 필리핀 봉사단 조정국(PNVSCA)

 

“영주씨”

“어랏! 선생님 여기 웬일이세요?"

할말을 잃고 머리가 멍해진다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다. 서울에서 이틀 전에 만났는데 다시 여기서 만날 줄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 벌써 3번째다.

 

2002년 미술학과 3학년 과정을 끝내고 12월20일에 필리핀에 졸업여행 삼아 친구랑 둘이서 온 것을 인연으로 해서 6개월을 거주했던 적이 있다. 그때 23살의 철없는 나의 행동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그때했던 경험들이 내 인생에 최고의 추억들로 남은 것 같다. 지금보다 훨씬 열정적이고 거침없는 행동들로 주변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고, 오죽하면 기도 제목이 죽을 때는 아프지 않게 한방에 죽여주세요 였겠는가? 우연히 카띠클란으로 가는 배 안에서 KOICA 단원들을 만나게 됐다. 그 중에 칼리보 문미정 단원을 만나게 되면서 나의 인생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나 싶다. 같이 배를 타고 가는 도중 언니가 준 연락처와 시간이 된다면 한번 방문하라는 언니의 말에 힘입어 보라카이를 다녀온 뒤에 언니 집에 방문을 하게 됐고 마닐라에서 언니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버렸다. 물론, 지금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친절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니 그 시절에 내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내 스스로가 깜짝 놀랄 정도다.

언니 집에 살게 되면서 잠깐 혼자서 팔라완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언니에게 빌린 코이카 가방이 나에게 6년 뒤에 다시 돌아온 이야기를 이 글에서 하고 싶다.

10일간 나홀로 여행하는 동안 낯선 곳의 새로운 체험이 즐겁기도 했지만, 그만큼 긴장을 많이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때의 여행은 엘리도에서 푸에르토 프린세사로 가기 위해 탔던 버스가 진흙길로 인해 벼랑으로 밀려 떨어질 뻔 한적도, 비치 근처에서 큰 도마뱀의 꼬리에 맞아서 시퍼렇게 멍들었던 기억도, 버스이동 도중에 만났던 미국인 선교사도, 혼자서 잠들은 방카에 모기장 위로 떨어지던 바퀴벌레들 외 여러 가지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었지만, 최종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살아있다는 안도감 보다는 비교할 수는 없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비행기 출발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근처 시장에서 구경을 하는 도중에 누군가 가방을 확 낚아 챘었다.

‘아 여기서 강도를 만나다니… 아~’

“KOICA 단원이신가요?”

‘뭐야, 이건.’

“예, 아닌데요. 미정언니한테서 빌린 건데요?”

“아.. 그래요 저와 같은,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서, 팔라완은 한국사람이 거의 없는데 한국사람이 보여서 너무 반가워서요. 제가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은데 마침 KOICA가방이 보여서 제가 모르는 선배단원인가 했어요.”

“아.. 예 그러세요.”

이때 아마도 그 단원의 눈에는 내가 천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먼 타국에서 그것도 시장에서 한국사람을 발견할 줄은 아마도 꿈에도 생각을 못했을 일이니까. 특히, 그는 몸이 아파서 향수병에 시달리는 중이었으니 그렇게 보였을지도.

그 우연치 않은 만남 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의 CO-WORKER와 같이 강 위의 레스토랑에서 거대한 랍스타를 선뜻 사준 것 보면 그 당시 내가 상당히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런 만남이 있은 후, 난 연락처도 물어보지 않은 채 비행기를 타고 일로일로로 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례하지 않았나 싶다. 언니한테 그 이야기를 하고 언니가 그 사람에게 통화하는 걸 본 기억이 난다. 언니 동기였다고 하는데 여행의 피곤함으로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 놓았던 것 같다.

“영주야 언제 열매가 생기는지 아니?”

“아니 몰라! 언젠데?”

“환경이나 기온이 변하면 식물은 꽃을 지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한단다. 다음을 위해서지”

“오 그래 너무 멋지다. 몰랐네.”

우기의 시작을 알리듯 강 저쪽에는 보라색 벼락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언니는 나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의 임지도 보여줬었고 옆집에 수의사였던 성철이 오빠도 소개시켜줬으며, 독일봉사단, 미국봉사단, 일본봉사단 등등 끊임없이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옆에서 난 할 줄 아는 것이 설거지 밖에 없어서 열심히 그것만 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난, KOICA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그 당시 미술전공은 봉사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전공에 대해서 후회해 본적은 없었기에 지원할 수 없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것이 컴퓨터 그래픽이었다.

‘지금 당장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따 놓으면 후에는 분명히 생길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고 그 해 바로 컴퓨터그래픽자격증을 땄었다. 그리고 엉뚱하게 도예분야에 지원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의욕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KOV로 살아보고 싶었기에 그 뒤로 몇 번의 방문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 지원할 수 있는 분야가 없었고 언니와의 연락도, 졸업 후 고된 생활고 속에서 점점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었다.

 

“아 진짜 일하기 싫다.”

양산부산대학병원 건설현장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무하던 도중, 잠깐 인도네시아 선교를 10일간 휴가를 받아서 간 적이 있었다. 휴가 후, 첫 출근 날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 해야지’하고 단념하면서 동안 밀린 메일을 체크했다. 그때 난 보았다.

‘KOICA에서 44기 신규단원을 모집합니다’

라는 메일이 6년 만에 처음 찾아왔다. 지난 과거가 짧은 시간 동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이것이 하늘의 뜻인 것 같은 큰 착각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메일 확인을 하면서 제일 문제였던 분야도 확인했다. 하지만 지원할 수 있는 분야가 있었다 그것도 두 가지 분야나...

미술교육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 분야가 바로 내 눈에 바로 들어왔다. 모집요강을 확인하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술분야도 가능했지만, 기왕이면 몇 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래픽분야로 돕고 싶었고, 글을 작성하면서 그렇게 신이 날 수 없었다. 이제서야 내가 인정 받는구나 싶기도 하고 이 분야로 계속 일하길 잘했다는 생각하면서 혼자 대견해서 계속 웃음이 났다. 서류 준비를 하면서 지금 하는 일에 대한 욕심도 한편으로 나기 시작했다. 이 일을 지금 그만두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고 돈에 대한 미련도 솔직히 남았었다. 29살에 다시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려고 하니 정말 걸리는 것이 많았다. 모두들 봉사자의 삶이 좋은 일인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그 일에 몸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결과를 순차적으로 밟게 되고 어느새 이천 유네스코 훈련소에 발을 들이고 있는 나의 모습.

이때까지만 해도 과거의 기억으로 모든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던 나였기에... KOV가 되어있는 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인도네시아 협력단원 동기의 이야기가 내가 봉사자로서의 삶을 그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첫 필리핀, 베트남 현지 교육 때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교관 김상우입니다. 2002년 팔라완 XX대학에서 전기분야로 근무했었습니다.”

바로 그때 내 머리에 천둥이 치는 듯했다. 가슴이 쿵쿵 뛰어서 쳐다볼 수 가 없었다. 그 사람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 둘 자신의 소개가 시작되고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버렸고 그때 갑자기

“선생님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번쩍 손을 들었다. 내가 미쳤었나 보다.

“안됩니다.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습니다. 나중에 하죠.”

그렇다. 우린 다시 교관과 훈련생으로 2008년 9월에 만나게 되었다. 정말 기막힌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후에 김상우 선생님의 얘기로는 자신도 처음에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신규훈련생들의 자기소개서를 읽는 도중 세일러문(미정언니의 영어이름)이랑 자신의 얘기가 나와서 사뭇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의 인연이 다시 시작되고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순조로운 훈련소 생활을 마쳤다. 그 뒤 가진 술자리에서도 김상우 교관의 연락처를 난 적어두지 않았다. ‘필리핀으로 가면 2년간 만나지 못할텐데’라는 생각으로 서울에서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나의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집인 부산으로 돌아와서 이틀간 정신 없이 보내다가 부산 서면 한 카페에서 나는 완전히 기절할 지경에 빠져 들었다.

친구와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라, 저게 누구야, 내가 훈련소 생활이 많이 그리웠나? 왜 헛것이 보이지.’

한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아봤다. 분명, 김상우 선생님이 나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 선생님!!”

“아, 영주씨.”

“어머, 어디 가시는 길이예요!”

“화장실 가는 길에 보여서.”

“어머.. 아무래도 우리는 운명인가봐요.”

“뭐야. 됐거든요.”

“운명의 사제지간.. 흐흐.”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대는지 너무 당황스러워서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을 난 그제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이틀 전에 서울에서 본 그를 부산 땅에서 세 번째 우연히 만나다니..

할말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선생님께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너무 당황해서 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님도 어지간히 당혹스러웠던 것 같다. 부산에 여자친구가 살고 있고 우리 집 근처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생님의 여자친구와 잠깐의 인사와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헤어졌지만 흥분된 상태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들 이 이야기를 하면 선생님의 운명의 남자라고 얘기들 한다. 미안하지만, 운명의 남자는 2009년 3월에 결혼했다. 물론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나의 운명은 오히려 KOV와 PHILPPINES이 아닌가 한다.

이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이후에 필리핀에 다시 입국한 난 나의 놀라운 현지적응력에 다시 한번 놀랐다. 23살의 나와 29살의 나는 이미 많이 변해있었다. 하지만 필리핀은 몇 개의 쇼핑몰과 빌딩이 더 세워진 것 외에는 그대로였고, 예전 모습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던 23살의 내가 그대로 보여지는 듯 했다.

이후 놀라운 사실은 29기 김수옥 단원에 의해서다. 현지 부임 이후로 가장 큰일은 내가 2년간 살아갈 집을 찾는 일이다. 선배단원의 친절로 우리가 임시로 묵을 하숙집을 보여주려고 데려간 곳은 놀랍게도 내가 6년 전에 살았던 빌리지 안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를 위해 신경 써준 선배에게도 감사하지만 꼭 한번 다시 가고 싶었던 내가 살았던 하우스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곳의 외형은 리모델링 되었지만 옛날의 모형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놀라운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면서 내가 왜 이곳에 왔는가에 대한 확신도 들고 지난 6년간 내가 이 일을 위해 준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다 일어난 인연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귀국 단원 문미정 선배와 6년 만에 연락이 되었다. 연락처를 잃어 버려서 언니를 여러 번 찾았지만, 그때마다 실패해서 많이 그리웠던 사람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정말 봉사하는 마음으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여러 가지로 모범을 보여줬던 고마운 사람이기에 더욱 잊지 못했던 그 사람과 연락이 된 것이다.

“어머, 영주야 왜 연락이 잘 안되니? 내가 얼마나 많이 했는데”

“정말! 언니 연락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그만 언니 연락처를 잃어 버렸지 뭐야”

“야, 네가 봉사단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도 그래”

언니의 말투는 여전하다. 그래도 그리운 목소리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곧 필리핀에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도 곧 필리핀에서 재회를 하게 되리라.

이러한 준비된 만남이 있었기에 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앞으로 어떠한 만남이 내 앞에 있게 될지.. 날 위해 준비되어 있을지..

제2의 고향이 될지도, 아니 이미 되어버린, 아시아의 스페인, 이곳에서의 2년간 생활이 정말로 기대된다.

김정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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