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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할끼타 필리피나스] “불을 피하세요!” “아니요, 더 가까이 갈래요”

등록일 2009년05월14일 15시01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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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일자: 2009-05-14
 

김상아(30기)

활동분야: 한국어교육

활동기관: 기술교육개발청(TESDA Regional Training Center(La Union))  

  

봄바람이 두 뺨을 간질이는 한국의 5월. 그러나 투게가라오에 떠 있는 5월의 태양은 저 멀리 아프리카 어딘가의 햇살과 겨루어보겠다는 듯, 여기저기에 힘자랑을 시작한다. 임지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잘 달구어진 프라이팬으로 달려든 계란 한 알이 된 듯 했다.

 

나는 한국어 교육 분야로 필리핀 북부 ‘투게가라오(Tuguegarao)'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이 지방의 토속 지명인 투게가라오는 ’투게(Tugue:불) + 가라오(garao :피하라)'라는 은근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뜻을 품고 있는 곳이다. 필리핀의 어느 지역이든지 덥지 않은 곳이 없겠냐만은 이곳은 우리나라 대구시와 같은 분지 지역으로 특히 보이지 않는 활화산이 있는 듯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곳이다. 그 열기로 투게가라오로 파견된 후,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나에게 ‘밀크’라는 예칭을 불러주던 기관 직원분들은 이제는 나를 ‘밀크커피’라고 부르며 웃는다. 하지만 나는 변해버린 피부색이나 가마솥 더위보다도, 낯선 생활환경에서 느끼는 외로움으로 조금씩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즈음, 첫 한국어수업을 할 무렵의 일이다. 낙후한 전기 시설로 인해 바람이 살짝 스쳐가거나, 회색 구름이 한 번 얼굴을 찌푸리기라도 하면, 교실은 어김없이 암흑이 되곤 했다. 종종 전기가 끊어지면, 나와 학생들은 그 동안에 배운 한국말로 ‘수다 떨기’에 돌입했다. 첫 정전에는 묘한 정적이 교실을 감쌌지만, 정전이 잦아질수록 우리의 ‘한국말 수다’ 영역도 점점 넓혀져 갔다.

 

그 날은 음식과 음식에 관련된 어휘를 배우는 날이었다. 창 밖으로 빗줄기가 토독토독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형광등은 숨을 죽였다. 그러자 학생들 또한 기다렸다는 듯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아, 어둠 속에서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우리 이제 무슨 얘기할까?’하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더 이상 정전은 교사인 나를 당황하게 만들지 못했다.

 

마침 어제 시장에서 본 과일 좌판이 떠올랐다. 나는 학생들에게 우리가 이미 배운 ‘맛있어요’, ‘맛없어요’, ‘싸요’, ‘비싸요’ 등등의 어휘를 사용해 필리핀 과일 중에서 망고가 가장 훌륭하고, 더없이 맛있는 과일이라며 망고예찬론을 펼쳤다. 학생들은 한국에서 망고 구경을 하기 쉽지 않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외국인인 내가 그 동안 조금 비싸게 샀던 망고 가격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그렇게 필리핀과 한국의 과일과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전기가 들어왔고 우리는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그 이튿날 수업준비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 교실에 들어서자, 책상 위에 노오랗게 잘 생긴 망고 세개가 곱게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어제 한 이야기 때문인가 보다 생각하곤 말조심을 해야겠노라고 다짐했다.

 

우리에게 쉽게 보이는 과일이 그들에겐 부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다음날, 또 다른 학생이 작은 파파야 한 통을 가져오면서 “선생님, 우리 집 뒤에 농장에서 땄어요”라며 건네어 주는 게 아닌가. 나는 또한 고맙게 받았다.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온갖 과일이 나의 책상에 소박하게 올려져 있었다. 바나나, 망고, 파파야, 귤, 사과, 이름 모를 필리핀의 과일까지. 고맙지만 괜찮다고 말을 해도 그 ‘과일 봉사’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자신들끼리 회의(?)를 거쳐 서로 돌아가며 나에게 선물을 하는 듯 했다.

 

처음으로 임지에 파견돼 첫 수업을 할 때를 기다릴 무렵,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양철지붕 집 밑에서 생각했었다.

‘이 뜨거운 햇볕보다도 더 뜨겁게 봉사하겠다’

하지만 내가 쉽게 가졌던 봉사에 대한 열정은 투게가라오의 햇볕에 깝살리고, 그렇게 풀 죽은 나를 현지 학생분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마음으로 되살려줬다. 봉사를 단순히 ‘건네주기’라고 생각했던 나는 봉사는 절대 일방적인 원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함께 건네고, 나누는 협력과 협조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을 일상의 한 부분에서 느꼈다. 한국어 교육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언어적 봉사는 서로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나의 마음을 보여주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서로의 나라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두 나라가 가까워지고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보았다.  

 

한 차례 과일봉사를 받고나니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한국어 수업 전 과정을 종료한 후에 우리는 함께 김밥과 김치전을 만들며 귀중한 하루를 보냈다. 마른 장작으로 불을 피우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만든 김치전이지만 맛은 “마사랍!(masarap:맛있어요)이었다. 물론, 망고는 덤이다.

 지금 나는 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투게가라오를 향해, 그리고 이곳 사람들에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나에게 투게가라오는 더 이상 “불을 피하세요”가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 한다면, 나는 “아니요, 더 가까이 갈래요”라고 대답하겠다. 나 역시 가슴 속에 작은 불을 지니고 있기에…

김정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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