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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자의 사람香] 12년의 필리핀 생활,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아태나사렛신학대학원 권동환 교수

등록일 2010년08월19일 18시12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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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일자: 2010-08-19
 

 

장기자의 사람

‘한때의 마주침’이 아닌 서로의 향기를 오래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리운 만남들’. 살아가면서 가장 좋은 향기는 ‘사람의 향기’가 아닐까? 5년간 취재 현장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향기를 담아본다. –편집자 주

 

 

우연치 않은 기회에 알게 된 권동환 교수는 안티폴로 지역에 위치한 아테나사렛신학대학원에서 한국인으로선 최초이자 최연소 교수로 지금까지 아시아 24개국의 신학대학원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필리핀에서 한국인 교수라니! 교환교수도 아니고 방문교수도 아니고 정교수로 7년 넘게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에게 왠지 관심이 갔다.

2남2녀의 자녀를 두고 와이프 김연범 교수와 함께 필리핀에서 지낸 지 12년째. 권동환 교수는 “12년간의 파란만장했던 필리핀 생활은 내 인생을 180도 바꾸는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한다. 

 

12년 전 그는 연극인. 방송인.

“지금도 한국에서 저를 아는 주위 사람들은 ‘너가 신학대학원 교수면 나는 음대학원 교수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해를 못해요. 제가 교수라는 것. 그것도 신학대학원에서 100% 영어로 수업을 진행 한다는 것. 필리핀으로 유학 가기 전 28년간 저를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는 정말 상상이 안되는 일이죠”

 

권동환 교수는 한국에서 서울예대 연극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동기들 중에서는 김명민, 이휘재, 송은이 등이 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연극을 좀 했어요. ‘수레무대’라는 극단을 선배들과 같이 창단했는데 아직도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극단이예요. ‘수레무대’는 사실 수레에다가 무대를 싣고 다니며 유랑하던 프랑스 유랑 극단입니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고 공연을 원하는 관객들이 있는 곳이라면 서슴치 않고 무대를 펼쳤죠. 이들의 연극들 중에는 ‘꼬메디아 델 아르떼’라는 코미디가 있는데 프랑스 문화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저희도 그런 정신에서 92년에 시작했죠”

“경상남도 통영이라는 지역에서 한시간 반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면 ‘자포’라는 섬이 있어요. 저희 공포의 외인구단(수레극단 창단멤버들)은 거기서 6개월간의 지옥합숙훈련을 끝내고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연극을 하다가 서울로 입성하는 것을 1년 계획으로 했어요”

 

권 교수는 수레무대에서 ‘스카펭의 간계’ 연극에서 조연출을, 오명진 선생의 대표작 ‘시집가는 날’에서 조연출 겸 연기자로 활동을 했었다.

3년간 열심히 연극을 했지만 돌아온 건 관객들의 무반응이었다. 가진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에서 기대했던 만큼의 반응이 오질 않자 그는 ‘연극을 계속 해야 할까’하는 회의가 몰려왔다고 한다.

그때 즈음 SBS방송국에 FD로 갔던 선배가 케이블 방송 PD를 맡게 되면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한 시절에 방송국 일은 재미 있을 것 같았다. 방송국에 첫 발을 들여놓은 권동환 교수는 FD 막내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작비로 먹고 사는 게 많았어요. 계속 일이 많았으니까.. 1년 반 정도 방송일을 해보니 일단 ‘너무 힘들다. 그리고 너무 소모적이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MBC 생방송 ‘아침을 달린다’ 오퍼가 들어왔을 때도 거절했죠. 당시 그 프로그램은 생방에다가 장수 프로그램이라 들어가기가 하늘에 별따기 였는데.. 제가 좀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 방송을 했었을 겁니다”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미국 유학을 계획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의 계획을 안 주위 대학 선배들은 모두 그를 말렸다. ‘내가 너 같은 사람 진짜 많이 봤다’ ‘지금 유학가면 망한다’라며..

그도 이해가 가는 게 권동환 교수는 서울예대를 졸업해 학사학위가 없었고 영어 실력도 전무했다. 그러나 이미 유학을 결심한 터라 다른 곳에 마음을 둘 여유가 없었던 그는 미국행에서 필리핀행으로 계획을 살짝 수정했다. 필리핀을 한번 왔다간 경험이 있는 그의 계획안에는 ‘필리핀에서 영어공부를 하면서 편입해서 학사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간다’는 것.

당시 사귀던 지금의 아내 김연근 (현재 아태나사렛신대학원 교수)도 그때는 어린이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유학할 생각이 많았다.

권동환 교수는 1998년 2월28일 아내와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같은해 3월3일 유학을 목적으로 필리핀에 건너왔다.

 

필리핀과의 인연

“지금 생각해보면 말렸던 선배들이 이해가 가요. 정말 무모했죠. 저 같은 사람이 지금도 있다면 저도 백번은 말렸을 꺼예요. 준비 없이 가지 마라. 그래서 필리핀에 와서도 우열곡절이 많았어요”

“항상 해외에 나갈 때 누구를 통해서 오잖아요. 그 사람을 잘 만나야 되요. 저는 아태나사렛신학대학원을 다니던 전도사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분은 지금 제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 신대학원에 다닐 것을 권유했어요. 저는 싫다고 했죠. 내가 신학교에 왜 가냐고.. 갈 이유가 없다고.. 가기 싫다고..”

 

어려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닌 적이 있지만 고부간의 갈등이 깊었던 부모님 덕(?)에 교회로 가는 발걸음을 끊었던 권교수였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하필 신학대학원이라니.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반면에 아내 김연근씨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이 대학원에는 영어학과가 있었고 아테네오와 UP보다 좀 더 안정적인 환경이라 생각했던 것.

김연근씨가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 학교를 다닐 때 즈음, 권동환 교수는 UP연극학과에 편입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모른 채 떨어지고 말았다.

 

“또 한번 좌절했죠. 영어도 안되지. 학교도 안되지. 그렇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그나마 집사람에게 고마웠던 게.. 제게 큰 위로가 됐어요. 계속해서 ‘할 수 있다’면서 큰 용기를 주었죠”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내가 공부를 하고 그는 집안살림을 맡았다. 밥하고 청소하고.. 세탁기가 없어 손빨래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어느 분이 자기는 한국에서 ‘독학사’라는 것을 했다는 거예요. 학사학위를 독학해서 시험을 치르고 시험에 통과를 하면 학사학위를 준다는 거죠. 저는 ‘바로 이거다’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독학을 시작했어요. 또 무모한 일을 한 거예요”

“밥하고 빨래하면서 틈틈이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시험을 봤죠. 단계별로 시험을 보는 것인데 1,2,3단계까지는 붙었다가 4단계에서 한과목을 패스하지 못했어요. 패스를 못하면 또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제 인생에서 이런 절망감이 없었어요.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마누라 볼 면목도 없고.. 집에 볼 면목도 없고..”

 

다시 1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그에겐 무척 어렵고 힘들었으나 지금에서야 생각을 하면 이 1년이란 기간 동안 영어공부를 실질적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됐고 교수생활을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그에게는 확실히 길었던 1년간의 시간을 보내고 난 2000년 12월. 독학사 마지막 시험에 무사히 합격한 후, 2001년 3월 기다리고 고대하던 학사학위를 받았다.

 

또다시 필리핀에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

학사학위를 받았으니 계획했던 대로 미국을 가야 하는데 경제적인 여유가 너무 없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1년간 서강대 어린이 학원에서 100%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영어강사로 일을 했다. 둘째 아이를 낳은 아내는 학업의 막바지에 접어든 상태라 필리핀에 있어야 했다. 다행이 1년간 벌어들인 수익은 그에게 여유를 주었고 미국 시립대학원 연극과에 입학원서를 받아 진짜 미국행으로 떠나도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칠 않은 거예요. 이상하게도 그랬어요. 담임목사님에게 상담을 받으면서 다시 필리핀에서 신학대학원을 다니기로 마음먹게 됐어요. 지금은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건지 모르지만.. 그냥 하나님의 섭리 같아요”

 

2002년 또다시 필리핀에 들어온 권교수는 1년 만에 대학원을 졸업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초인간적인 힘’이었다.

 

“2003년 졸업을 마치자 저희 학교에서 교수제의가 들어왔어요. 현재 미디어학과에 교수 자리가 비었으니 졸업생 중에서 교수 후보자를 찾고 있다. 해볼 생각이 있느냐? 고요. 사실 필리핀에 남아야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비운 상태였는데 저에겐 아주 좋은 기회였고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길이 아닌가.. 확신하게 됐어요”

 

7년간의 교수 생활. 교육의 가치와 보람 느껴

아태나사렛신학대학원은 1983년 개교해 학교 이름대로 아시아태평양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다. 학교소개 책자에 따르면 현재까지 500여명이 넘은 졸업생들을 배출했고 졸업생들은 선교사로, 목회자로, 지방감독으로, 신학교 교수로 지내며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터키, 케냐, 네팔, 인도, 방글라데시, 미얀마, 인도네시아, 파푸아 뉴기니아, 태국을 비롯한 세계 24개국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아태나사렛신학대학원은 전 세개 7개 지구로 나눠져 있고 50개 교육기관이 있으며 한국에도 천안 나사렛 신학대학교가 있다. 학과로는 목회학, 기독교 교육학, 기독교 커뮤니케이션, 신학, 통합 아동 교육학 등이 있으며 권동환 교수는 기독교 커뮤니케이션 학부장이자 교수로 7년째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서 연극과 방송을 했던 것. 영어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것. 1년간 영어공부를 했던 것. 이 모든 하나하나가 지금의 그를 있게 해준 밑바탕이 됐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 50%는 필리핀 학생들이고 나머지 50%는 일본, 중국, 태만, 미얀마, 한국 등에서 옵니다. 처음 가르칠 때는 부담이 컸어요. 저보다 나이 어린 학생은 절반도 안되고 미국 학생들까지 떡 하니 앉아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지금까지 안 쫓겨난 걸 보면 인정 받고 있는다는 거겠죠?”

“수업할 때 제일 황당한 건 열심히 가르쳤는데도 기말고사 때 학생들이 도저히 모르겠다는 말을 할 때예요. 특히 미얀마 학생들은 제게 도전이 많이 되죠. 분명이 A라고 이야기 하는데 개념조차 이해 못할 땐.. 과연 공부나 제대로 할까. 도대체 여긴 왜 왔나. 싶죠. 그래서 항상 프린트물을 많이 주는 게 제 노하우라면 노하우예요. 들어서 모른다면 읽어서 공부를 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번 이야기 해서 알아들으리라 생각하지 않아요. 두번 세번. 여러 차례 같은 내용을 반복하죠”

 

힘들게 가르쳤던 만큼 보람 찬 일은 권 교수 자신이 직접 교육의 가치를 피부로 느꼈을 때다.

 

“올 2월에 미얀마를 갔는데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있었어요. 그 학생들이 신학교에서 교수로 또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교 내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은걸 보면서 아.. 이것이구나. 했어요”

 

올해 권동환 교수는 UP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여전히 새로운 학문에 도전하면서 그가 가진 열정을 학생들에게 쏟아 부을 예정이다.

 

커뮤니케이션 교수로서 바라본 필리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이 전공인 그에게 필리핀 미디어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았다. 오랫동안 필리핀에서 생활한 그가 바라본 필리핀 미디어 시각은 남다를 것 같았다.

 

“솔직히 필리핀 미디어 시장은 아시아를 마켓으로 놓고 봤을 때 암울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필리핀 사회가 진지하지 못하니까 코믹한 방송만 계속 내보내게 되죠. 필리핀 시민들이 EDSA혁명을 겪으면서 좀더 사회를 개혁해야겠다는 전제가 있었다면 지금은 혁명을 한번, 두번 겪으면서 ‘과연 우리가 원했던 혁명은 이런 것이었나’하고 실망감이 생긴 거죠. 그러면서 더 이상 ‘혁명’, ‘발전’, ‘변형’이라는 단어보다 서로 웃으며 넘겨버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이 힘드니까요. 방송은 현실을 반형하다 보니 코미디나 유치한 방송을 틀어주면서 사람들의 힘든 마음을 달래는 거죠. 심각한 내용은 시청자들이 싫어하니까요”

“둘째로 EDSA혁명을 겪으면서 필리핀 사회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자폐한 상황들이 방송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동남아시아만 보더라도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보다 방송시장이 작아요. 제작환경이 열악하다 보니까 90년도 이후에는 자체 제작보다 외부수입이 더 많아지는 현상이 생겨났어요. 처음에는 맥시코 드라마, 그리고 대만, 일본 이제는 한국 것. 왜냐.. 경제적인 논리에서 자체 제작보다 수입한 게 저렴하니까. 특히 한국 방송의 경우, 저렴하게 수입한 것이 상당한 메리트로 작용했어요. 우리나라가 사실 선심이 있잖아요. 한국 드라마가 처음에 수출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2003~2004년 가을동화의 경우 편당 가격이 일,이천불이 안됐대요. 자체제작비와 단가면에서 게임이 안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자체제작이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가격경쟁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셋째로 필리핀 미디어 시스템이 자국방송을 지킨다던가 애국적으로 보호한다던가.. 그런 정책이 전무합니다. 이로 인해 지난 10년 동안 방송과 음반 시장에 큰 타격을 줬어요. 영화의 경우, 97년 이전에는 1년에 자체제작이 100편이 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절반도 안된다고 합니다. 배급사들이 제작사를 좌지우지하면서 결국 영화 제작사가 배급사에 종속이 되버리는 게 된 거죠”

 

필리핀교민언론지가 교민들과 소통하는 법

내친김에 필리핀교민언론지가 교민들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들어보았다. 더 가치있는 정보로 교민들을 찾아가고픈 기자의 욕심을 조금 담아서..

 

“교민언론은 시장여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국내 언론 현상과 같은 소비자이자 공급자인 프로슈머(Prosumer)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봅니다. 10년 전과 비교해 볼 때 교민언론지도 많이 발전했어요. 교민들의 상권이 커지고 커뮤니티가 커지다 보니까 제가 볼 때는 광고주들이 엄청나게 늘었고요. 하지만 언론계 사장님들을 만나보면 광고비는 줄었다고 합니다. 이는 시장 때문이 아니라 경쟁이 심화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교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를 주는 언론지가 더 많은 광고주들을 확보하는 거지요. 교민들은 정보가 필요로 합니다. 교민언론지가 정보를 주었을 때 한국 사회, 필리핀 내에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한번 더 고려해보면 교민이 원하는 미디어가 되지 않을까요?”

“설문조사도 하나의 팁입니다. 국내 방송계에서 막대한 돈을 들여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죠. 어느 지역에 누가 사는지. 사업가들이 사는지 기러기 엄마들이 사는지. 어떤 정보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목말라하는지. 지금 보는 신문에 만족해 하고 있는지. 안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면 언론사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김정훈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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